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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고 싶어

by 류완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대화가 무르익어 갈 때 즈음

느닷없이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새해에는 하고 싶은 거 있어?"


S는 무심히 던진 질문에 사뭇 진지한 대답을 건넸습니다.


"음, 그래. 요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


"왜? 무슨 일 있냐?"


"그냥, 이젠 변화가 필요한 시간이 온 것 같아서."


"야. 다 그래. 누군 만족해서 사는 것 같냐? 나도 요즘 사는 게 말이 아니야."


"아니 이번엔 좀 다른 기분이야."


"어떻게?"


"해마다 조금씩 후회하고 살았던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그 마음을 그냥 놔두고 살았거든.

어느 날 문득 그 마음을 꺼내보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쌓여있는 것 같은 거야.

그 후회를 한꺼번에 쏟아 내고 보니 이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분? 뭐 그런 거 같아."


무심코 던진 대화의 주제였는데 S의 사뭇 진지한 대답에 분위기가 제법 무겁게 흘렀습니다.

무슨 결론에 닿을지 궁금하기도 해서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뭘 어떻게 다시 시작할 건데?"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따지듯, 혹은 취조하듯 마땅치 않은 어투로 질문이 흘렀습니다.

다행히 S는 별 개의치 않는 듯, 성실하게 답을 이어갔습니다.


"지금껏 해 왔던 모든 걸 바꾸고 싶어.

하던 일도 정리하고, 관계도 정리하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제법 진지하고 확신에 찬 대답에 긴장감이 높아졌습니다.

여기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K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새해일 필요가 있을까?"


"그건 무슨 말이야?"


"새로 시작하는데 새해라는 기점이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 그냥 지금 시작하면 되는 거지."


"아니 나는 새로 시작하는데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하는 말이지 지금 당장 한다는 건 아니고."


K는 표정의 변화 없이 자신의 생각을 이어 붙였습니다.


"그러니까 새로 시작하는 게 꼭 새해라는 시점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거지.

지금 당장 하던가, 아니면 준비 되든대로 그냥 하면 되는 거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결국 핑계 아니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1월 1일이 되면 미션 수행하듯 거사를 치르겠다는 말이겠냐?"


"그러니까 네가 하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는 거야. 진실성도 없어 보이고."


대화 내용이 산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주제를 정리하고자 두 친구 대화 사이로 급히 끼어들었습니다.


"그래 S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아. 나도 요즘 부쩍 그런 기분이니까.

그래도 우리 나이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그렇게 되는 건 아니잖아?"

텐션을 올리던 대화는 점차 차분한 분위기를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K는 소 주제의 결론을 향한 질문을 건넸습니다.


"그래서, 시작하고 싶은 일은 뭔데?"


입맛이 없다던 S는 눈 앞의 음식을 몇 번 뒤적이더니 천천히 대답했습니다.


"딱히...... 있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S의 대답을 무표정하게 듣던 K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농담처럼 한 마디 남겼습니다.


"네가 아직도 철이 없구나."








모임이 중단된 연말연시, 작년 이맘때 친구들과의 만남이 떠올랐습니다.

친구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각색해서 짧은 이야기를 만들어 봤습니다.

각색이 들어갔으니 온전한 실화는 아니고 실제 나누었던 대화를 담아냈으니 꼭 소설도 아니네요.

장르도 딱 그 중간, 대화 내용처럼 뭔가 어중간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 대화에서 배역은 서로 바꾸었습니다.

사실 나는 K일수도 있고, S일수도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지만

흐르는 대화의 결론에는 다들 비슷한 감정을 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친구의 대답에 우리는 모두 묘한 긴장감을 느꼈습니다.

모두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그냥 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꿈을 꾸고 싶으면서도 섣부른 변화를 응원할 만큼 마음의 여유는 없었습니다.


한 해의 끝에서 새 해의 시작을 맞이하는 시점,

인생의 시작과 끝을 연습하듯 반복된 시간이 흐릅니다.

어느덧, 변화를 꿈꾸던 청춘은 덧없이 시간을 흘려보냈고,

지금은 변함없는 일상에 마음을 두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 없기에 변화는 필연이기도 합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아무 탈 없이 그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한 해 동안 우리는 모두 변화를 감당하고 살았습니다.

새해에는 많은 분들이 한 번 더 변화를 겪을 것 같습니다.

피할 수 없는 변화라면 즐기고 내가 원하는 변화라면 화끈하게 붙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너무 얌전하게만 살다 보니 내 인생의 그림에는 눈에 띄는 점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열심히 구르고, 꼼지락거리다 보면 누군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기 돌멩이 같은 게 구르는 것 같다고 알아채 주지 않을까요?


새해에는 '네가 정말 철이 없구나'라는 말을 듣는 걸 목표로 할까 생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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