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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Jan 30. 2021

굽은 길


1. 


"이 길은 특이하게 휘어져 있네요?"

집 근처를 방문한 후배와 길을 걷는데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동네에서 20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앞으로만 걷던 길이었습니다.

휘어져 있다는 생각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습니다.

생각 없이 걸으며 세월을 채우다 보니 그 모습을 한 번도 마음에 담지 못했나 봅니다.



2. 


"막내 주민등록번호가 뭐였더라?"

처음으로 방문한 병원에서 아이의 주민등록 번호가 생각이 안 납니다.

외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생년월일 말고 

뒷 번호는 한 번도 기억에 담은 적이 없었습니다.

"너 주민등록 번호 아니?"

"그게 뭔데요? 나한테 그런 게 있어요?"

"아니야 됐어." 

아이는 자기도 핸드폰 같은 것이 있는 거냐며 계속 캐묻습니다.



3. 


집 근처로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둘째 아들의 친구 엄마를 만났습니다.

"어머, 너 왜 이렇게 컸니? 엄마 아빠는 작은데 어떻게 이럴 수 있니?"

아니 이 아줌마가.... 

나도 이 녀석이 왜 혼자만 떨렁 컸는지 잘 모릅니다. 

그동안 컸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매일 보다 보니 자라고 있나 보다 생각했을 뿐

친구 엄마가 아빠의 짧은 몸과 비교할 정도로 컷을 줄은 몰랐습니다.



4.


영화를 보다가 막내딸이 궁금한 게 있다고 합니다.

"아빠가 역사를 공부했잖아. 다 물어봐."

초등학생의 막연하고 뻔 한 질문인데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뭐였지? 가물가물하네. 미안 아빠는 서양사를 전공했거든."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더 알려고 하지 않는 마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는데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항상 보이기 때문에 놓치는 허점이 있습니다.

항상 머물러 있기에 무심한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믿고 있기에 보지 못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를 가장 외면하는 사람이 나이기도 합니다.

내 이성은 내 몸을 온전히 이끌지 못합니다.

이성이 몸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빈둥거리며 마음대로 먹고살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사실이겠지요.

그러나 내가 아는 부분은 나도 모르게 부풀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부분은 거짓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길은 살짝 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걷는 동안 곧게 앞으로 걷는다고 믿었습니다.

반복된 경험은 시선을 왜곡합니다.

무던하게 보낸 시간들이 왜곡을 단단하게 다집니다.


"너는 원래 그런 애잖아."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여자 애가 그러면 안되지."

"남자가 돼서 왜 그러냐?"


인생은 저마다 자기의 길로 굽어져 있습니다. 

그 길을 나는 혹시 내 생각대로 걸어야 한다고 믿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요?


"나는 잘 몰라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앞으로 내 삶에서 가장 많이 내어 놓는 고백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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