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지로 하는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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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고학년 때쯤 학습지를 했다. A4와 B4 두 종류 크기에 과목별로 책자가 있는 구성이었다. 국영수와 함께 몇 과목이 더 있었고, 한 달에 두 번 큰 봉투에 넣어진 채로 배송되었던 것이 기억난다. 처음 학습지가 배송되었던 날은 나에게 온 선물을 받는 설레는 기분으로 봉투를 뜯어보았다. 알록달록 학습지 표지 뒤에 있는 문제들이 보였고, 빨리 문제를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교재 외에 같이 들어있는 여러 가지 장난감 같은 학습 자료들도 학습지를 좋아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이런 기분이라면 학습지 문제는 얼마든지 풀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며칠은 순조로웠다. 생각보다 하루 분양을 푸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다음 페이지가 궁금하기도 했다. 학교 갔다 오면 제일 먼저 학습지를 찾아 풀었고, 짧은 시간 동안 어렵지 않게 하루 정해진 분량을 끝낼 수 있었다. 그날 숙제를 끝낸 나 자신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학습지가 밀린다는 친구들의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니 점점 하기가 싫어졌다. 본격적으로 과목별로 진도가 진행되자 처음에는 신기하고 재미있게 보였던 문제집을 푸는 게, 지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루에 소화하기에는 분량도 꽤 많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특히 좋아하지 않는 과목의 하루 분량을 다 끝내려면 시간이 끝도 없이 늘어졌다. 매일매일 꾸준히 일정한 분량을 푼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다 하루 어떤 일로 인해 밀려버렸을 때, 다음날 2일 치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차피 내일도 다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드니 하루 삐끗한 날부터는 쭉 문제집에 손을 대지 않고 놓아버리는 날이 많았다. 이러다 보니 진도가 밀리고, 처음 백지상태 그대로의 학습지가 쌓여갔다. 결국엔 학습지가 배달된 봉투가 뜯기지 않은 채로 쌓여만 갔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1년 약정을 하고 큰돈을 부담하며 어렵게 시작한 학습지가 뜯지도 않은 상태로 쌓여가는 걸 본 엄마는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한 번씩 엄마가 학습지는 이제 안 할 거냐고, 이럴 거면 왜 시켜달라 했냐고, 1년은 약속했으니 그동안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얘기할 때마다 그래, 오늘부터라도 다시 시작해봐야지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학습지가 밀리기 시작하는 건 똑같았다. 결국 1년 중 6개월 이상의 학습지는 내 손에 의해 뜯겨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졌고, 이때 한 것이 내 학창 시절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학습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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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6살 가을에 어린이 집 선생님과 하반기 전화 상담 중이었다.
‘어머니, 00이 한글 공부를 좀 시켜 주시는 게 어때요…? 올해 코로나로 인해 아이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어머님들이 많이들 한글 공부를 시키셨나 봐요. 친구들 대부분이 한글을 아는데 00 이는 모르는 거 같아서, 친구들하고 놀 때 혹 시 한글을 몰라 어려움이 생길까 봐 말씀드려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학습지를 시켜줄 고민을 했던 때가. 그리고 알게 되었다. 요즘 학습지는 대부분 스마트 패드를 이용해서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종이로 된 학습지도 있다. 하지만 두 가지 다 체험 수업을 받아본 결과, 아이는 현란한 스마트 패드에 눈을 빼앗긴 후로는 종이로 된 학습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이가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고, 한글 공부보다 영상 노출이 더 걱정되어 그때 학습지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었다. 한글은 EBS 프로그램과 문제집을 이용해서 해결했을 뿐이다.
그리고 1년쯤 후, 1학년이 되기 전 마지막 겨울, 아파트 단지 내에 초등 예비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습지 홍보를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어떻게 공부 습관을 들여주어야 할까 고민하던 중 마주친 학습지, 난 이것저것 생각해본 끝에 결국 스마트 패드로 된 학습지를 계약했다. 공부는 스스로 필요에 의해 필요한 부분을 찾아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나로서는 하루 10~20분, 그것도 종이에 연필로 써가면서 하는 학습지가 아니라 스마트 기기로 하는 공부를 한다고 해서 학습지에서 광고하는 것처럼 아이의 지식이 눈에 띄게 늘거나 학습능력에 큰 향상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마트 패드 내에 재미있게 구성된 영상과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흥미와 재미만 가지고 이렇게 공부를 시작하다가 나중에 본격적으로 해야 하는 지루하고 그다지 재미없는 공부를 해야 될 때는 하기 싫어할까 봐 망설여지는 부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한 이유는 일단 본인이 원하는 방법인 스마트 패드를 통해서라도 지금부터 매일 10~20분씩 꾸준히 공부하는 습관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었고, 이 스마트 패드 내에는 수많은 이야기 책을 콘텐츠로 보유하고 있어서 아이가 종이책과 병행하여 관심 있는 분야나 여러 분야의 책을 접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서였다. 그리고 난 워킹맘으로서 아이 공부를 직접 챙길 수 없으니, 스마트 패드를 이용해서라도 스스로 공부를 하고, 궁금한 건 혼자서도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면 내가 복직을 해서도 계속해서 매일 일정 시간을 스스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1년 전에 비해, 아이는 하루 미디어 보는 시간을 정하고 잘 지키고 있었고, 또 패드 내의 영상물은 교육적이라는 생각에 아이가 원하는 스마트 패드로 학습지를 선택했다.
이것저것 다 고려하고 비교하고 결정해서 시작한 건, 내 판단이 잘못됐음을 알 기 까지는 한 두 달의 시간으로 충분했다. 2주 동안 무료 체험도 해봤고, 아이가 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시작한 학습지를 내가 예전에 종이 학습지를 밀린 것과 같이, 아니 더 빠른 속도로 아이는 금세 흥미를 잃고 멀리하기 시작했다. 처음 2~3주 정도는 어떤 프로그램들이 어떤 구성으로 있는지 관심 있개 살펴보더니 이내,
‘oo아, XX 할 시간이야. 오늘의 학습해야지.’라고, 아이를 부르면
‘나 xx 하기 싫어. 안 해.’라고 말을 하며 요리조리 도망 다닌다.
한 달 동안 빠짐없이 다 하면 좋아하는 거 하나 사준다는 당근을 걸면, 한 두 번은 하는 시늉을 하다가도 이내 하기 싫어했다. 스스로 알아서 하는 학습은커녕, 공부가 싫으면 여러 가지 다양한 지식 콘텐츠를 둘러보거나 패드 속의 수많은 책들을 읽을 것을 기대한 나로서는 참으로 당황스럽다. 매달 적지 않은 돈이 빠져나가는 걸 보면서 예전에 엄마도 이런 기분이셨을까 싶었다.
스스로 정한 학습 계획이 아닌, 매일 알아서 주어지는 공부가 하기 싫은 건 나나 우리 아이나 시대가 바뀌어도 똑같나 보다. 어릴 적 경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이에게 같은 실수를 한 대가를 2년 약정에 해당하는 돈으로 치렀다고 생각해야 하나.
지금은 이제 겨우 초1, 아직은 어리고 뛰어 놀 나이라 생각해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쿨하게 포기한 상태다. 또, 아이가 스마트 패드를 이용해서 학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아날로그 적인 생각이 맞다는 생각을 좀처럼 떨칠 수가 없다. 즉, 공부는 종이를 이용해서, 글씨를 써가며 혹은 문제를 풀어가며,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그래서 장수가 넘어가는 걸 눈으로 보고 성취감을 느끼면서 하는 공부가 요즘 같은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아이에게 학습 습관을 주기 위해 다른 어떤 방법을 같이 해볼지 지금도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