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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율 Jul 27. 2023

경복궁 해설-폭우 속의 해설

2023년 7월 20일 12시 


주말 내내 비소식이 있었다. 교통정체와 부담스러운 주차요금으로 서울시내에 차를 가지고 가는 일은 거의 없기에 이날도 우산 하나를 챙겨 들고 해설을 위해 집을 나섰다. 미리 예매해 둔 기차표가 폭우로 인해 전면 운행중지 되었다는 알람을 전날 받고는 지상으로 달리는 1호선 지하철도 안심할 수 없어 서둘러야 했다. 제발 내가 해설하는 두 시간 동안만은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해설 시간인 12시, 다행히 비는 멈춰있었다. 잠깐 우산을 놓아두고 갈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두 시까지는 비 예보가 있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산을 가져가기로 했다. 마이크에 포토카드에 우산까지 챙기니 짐이 너무 거추장스러워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커플, 우리 엄마 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시는 할머니 한 분, 그리고 혼자인 젊은 여성, 친구처럼 보이는 50대 중년 여성 두 분, 그리고 해설 시작 후 조금 지나서 합류한 초등 아이 둘과 함께 온 4 가족까지 총 10명의 관람객이 그날 나와 함께했다. 비가 와서 그렇게 덥지 않은 날씨 속에서, 이제는 두 번째 시민 해설이라고 조금은 마음의 여유까지 가지며 해설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해설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폭우가 내렸다.  


경복궁의 메인 장소인 근정전을 밖에서 보이는 모습부터 시작해 내부까지 설명을 막 마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엄청난 비 때문에 근정전 지붕 밑에 서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빗속을 뚫고 지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언제까지 있을 수도 없었다. 처음 겪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누가 좀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관람객들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웅성거렸고, 그다음 행동에 대한 지침을 내가 해주길 바라며 나만 쳐다보는 중이었다. 언제까지 내릴지 모르는 비가 그치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해설을 중단하더라도 경복궁의 또 다른 메인 장소인 경회루까지는 관람객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도 가득했다. 조금 비가 잦아드는 듯 보이자 난 다음장소로의 이동을 결정했다.

 

‘바로 앞, 왕의 평상시 업무공간이 사정전 출입문 지붕 아래로 이동하시겠습니다. 이동하실 때, 아까 말씀드렸던, 근정전 북쪽에 있는 현무랑 쥐 모양의 석상을 확인하시면서 지나가세요, 앗!!!......’


근정전 바로 뒤 전각인 사정전으로 가기 위해 근정전 월대 북쪽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2층 월대 계단과 1층 월대 계단 사이의 중간 조금 넓은 부분이었는데 빗물 때문에 돌바닥은 무척 미끄러웠고 월대 난간을 설명하느라 미처 바닥을 신경 쓰지 못했던 터였다. 지나가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물이 흥건한 돌바닥에 그만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입고 있던 청바지의 엉덩이와 바짓단은 물에 다 젖었고, 하필 물이 고여있던 바닥에 손을 짚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마이크가 물웅덩이에 풍덩 빠져버려 고장이 나버렸다.


아프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단지 너무 창피하고,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벌떡 일어나 다음 장소로 재빠르게 걸어갔다. 바지는 다 젖어 축축한 상태였고 고장 난 마이크는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지르다시피 목소리를 크게 내어 해설을 이어가 보았지만 빗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혀 잘 들리지 않아 관람객도 나도 전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관람객들의 걱정스러워하는 질문에 정말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입으로는 계속 괜찮다는 대답을 반복할 뿐이었다.  


 너무나 당황스러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눈앞이 캄캄했다. 폭우 속에서 마이크도 없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 조차도 느끼지 못한 채 그 장소를 해설하며 지나갔다. 우산을 안 챙겼으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는데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다행스럽게도 사정전을 지난 다음 장소부터는 점점 비가 잦아들었다. 수정전을 지나 경회루를 설명하고 나자 이제는 해설을 그만두더라도 메인 장소 두 곳을 다 설명했다는 안도감 덕분에 그 뒤부터는 마음을 비우고 맘 편히 해설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결국 해설 끝날 때까지 아까와 같은 폭우는 내리지 않았고 적당한 비가 오다 말다를 반복했을 뿐이었다. 무사히 마지막 장소까지 관람객들을 이끌고 해설을 마칠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날씨라도 해설이 1시간이 넘어가면 가만히 서 있는 채로 해설을 듣는 일은 힘들고 집중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해설 장소마다 앉을자리를, 특히 더운 여름에는 그늘 자리를 찾아 관람객들에게 앉길 권하며 해설을 한다. 하지만 이날은 비로 인해 처음부터 해설이 끝날 때까지 마땅히 앉을 장소가 없다는 걸 알고 무척 난감했다. 힘들어서 끝까지 못 따라오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한가득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서도(비록 아쉽게도 할머니 한 분은 갑자기 폭우가 내릴 때부터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셨지만) 끝까지 경복궁 안쪽 깊숙한 곳, 해설이 끝나는 장소까지 모두 함께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넘어지고 마이크가 고장 나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사정전 해설을 제대로 못 해 드린 거 같아 죄송할 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해설이 뭐라고 이 빗속을 뚫고 바지 단이 다 젖어가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 시간 반동안 날 따라와 주신 관람객들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해설을 마치고 사랑방에 들어와 해설 중 넘어진 일과 마이크가 고장 났음을 얘기한다. 다친 데는 없냐고 큰일 날뻔했다고 날 걱정해 주시는 마음이 너무 소중하다. 집에 와서 보니 넘어질 때 부딪혔는지 오른쪽 정강이 가운데 부분이 까지고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비 오는 날 돌계단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으며 다음  달 해설에는 또 어떤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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