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언 Jun 29. 2021

꽃말의 거짓말

사람들은 꽃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다. 요즘 계절엔 어떤 꽃이 예쁜지, 어떤 꽃이 자신에게 어울리는지와 같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에서 부터 어떻게 하면 오래 볼 수 있는지, 어디서 사면 싸게 살 수 있는지와 같은 실용적인 것들 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이러한 질문들은 꽃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므로 플로리스트인 나로서는 이 모든 것을 감사히 받으며 아는 만큼 소상히 답을 드리려고 한다. 친절한 동네 병원의사의 마음이랄까, 열나고 콕콕 쑤시고 목이 칼칼하고. 환자의 열이면 열 모두가 비슷한 증상을 말하지만 끝까지 경청하고 자신만의 처방을 내려주는 그들처럼 족히 백 번쯤은 들었을 말이지만 매번이 처음인 것 처럼 답을 전하려 한다. 

하지만 모든 질문이 반가운 것 만은 아니다. 뭐랄까, 싫다기 보다는 안타깝다고 할까. 질문하시는 분의 예쁜 마음과는 다르게 은연중 꽃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갖게 하는 것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꽃말'이 그렇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의미 두기를 좋아한다. 들판에 피어 있던 꽃도 이름이 지어지기 전까진 그저 들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로 부터 이름이 부여되면 그것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테고 거기에다 흥미로운 이야기 까지 덧입혀 진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로 부터 관심을 끌어낼 것이다. 그렇게 입혀진 이야기는 축소되고 간결해져 꽃말로 자리잡게 된다.

꽃은 인류가 탄생하기 훨씬 전부터 지구에 살았다. 태초의 인류는 색색의 것에 호기심을 가졌을 테고 분명 누군가는 한 두송이쯤 꺾어 동굴 안으로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동굴 벽화 보다 더 오래된 인류의 첫번째 예술행위는 꽃꽂이가 아닐까 조심스레 상상해 본다. 이렇듯 초기의 인류 때 부터 함께 하며 유구한 시간을 보내온 꽃들에게 그에 걸맞는 이야기가 없을 거라는 것,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꽃은 전설 속에서 연인에게 전해졌던 중요한 매개체가 되기도 했고 신화 속에서 신의 권위 혹은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꽃의 이름 그리고 이야기와 그것을 함축한 꽃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긴 시간을 이어져 왔다.

극히 일부에 국한되어 전해 지던 꽃말이 절정을 맞은 것은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서 였다. 항해술과 과학 기술의 발달로 세계 곳곳의 꽃과 식물은 영국으로 전해져 연구되었다. 꽃의 종류도 다양해 지고 양도 풍부해 지며 누구나 쉽게 꽃을 가질 수 있는, 대중적인 꽃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마침 이 무렵 자유 연애에 대한 분위기가 사회에 넓게 퍼지며 이성간에 꽃을 주고 받는 일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연애'라는게 그렇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당사자인 두 사람만이 간직하고 싶다. 아무리 자유연애의 시대가 열렸다 해도 밖에서 둘만 만나 꽁냥꽁냥 한다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었다. 연인들은 편지와 함께 보내어지는 꽃에 서로의 비밀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데이지’의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흰 백합’의 ‘나의 사랑은 순수합니다.’ 처럼 서정적인 것 부터 ‘아네모네’의 ‘나는 지금 아파요.’ 처럼 상황을 설명하는 것 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꽃의 종류와 함께 꽃다발에 들어가는 위치에 따라 하나의 문장으로 까지 표현할 수도 있었는데 당시의 꽃다발은 ‘빅토리안 포지 부케 Victorian posy bouquet’ 라는 고유의 디자인으로 발전하여 지금에 까지 이어지고 있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꽃말은 사전 형식의 ‘꽃말의 언어 Language of Flowers’ 가 출간되며 자연스레 정리되기 시작한다. 이후 이 책은 여러나라에서 출간되었고 또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책들이 나오게 되면서 꽃말은 친숙한 유행이 된다. 하지만 이후 꽃의 품종이 폭발적으로 늘어 나게 되고 책에 정리된 꽃말 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꽃 산업이 발전할 수록 전통적인 꽃의 의미는 희석되고 잊혀지며 점차 필요에 따라 새로운 꽃 말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어떤게 진짜고 가짜인지 아니, 진짜는 왜 진짜여야 하는지에 대한 정의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의 꽃말은 각자가 모두 다르게 알고 있을 것이고 예전부터 전해져 오던 것과도 다르다. 이제 더 이상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꽃말에 의미를 두어선 안되는 이유는 이 자체로 꽃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게 흰 꽃은 이별, 아픔, 배신 등과 같은 꽃말로 인식된다. 물론 흰색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순수나 순결과 같은 것과도 연계 될 것이다. 어차피 누군가가 만들어 덮어 씌운 것일 뿐인데 괜히 이런 꽃말을 들으면 기분이 썩 유쾌 할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그 꽃 자체가 꺼려지게 될지도 모른다. 괜한 일이다. 꽃은 아무런 죄가 없는데 말이다.

만일 꽃에 어떤 의미를 담고 싶다면 19세기의 연인들이 그러했듯 서로만의 비밀 언어를 담아 보면 어떨까. 이왕이면 긍정적인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의미가 깃들어진 꽃을 백일, 이백일 혹은 마음이 맞닿은 날 마다 선물해 주면 서로의 사랑은 더욱 크고 단단해질 것 같다. 솔로라면 좋아하는 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란 장미는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다던지, 분홍 리시안셔스는 기쁜 소식이 찾아 온다는 것 처럼. 굳이 꽃을 사지 않아도 지나가던 꽃집의 창을 통해 나의 꽃을 본다면 그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지도 모를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꽃, 살아 있음의 가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