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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Jun 28. 2021

꽃, 살아 있음의 가치


꽃은 억울하다. 사람들은 비싸다고도 하고 이내 시들건데 왜 사냐고도 한다. 심지어 꽃을 사는 것을 사치로 여기기 까지 하니 꽃의 입장에선 할 말이 참 많을 것이다. 어떡하나, 플로리스트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나라도 꽃을 위한 변호를 해야지.

우선은 길러내는 품이 보통이 아니다. 사람들은 꽃은 그저 들판에서 알아서 커가고 그것을 꺾어와 시장에 내다 파는 줄 안다. 우리가 아는 꽃의 이름을 떠 올려 보면 가장 만만한 장미 그리고 뒤를 이어 안개. 음, 아마도 여기서 진도가 한참은 나가지 않을 것이다. 좀 더 기억을 짜내어 보면 채송화, 달맞이꽃, 나팔꽃, 접시꽃  등 어렸을 적 부터 들어왔던 친숙한 이름의 꽃들을 나열할테다. 하지만 정작 꽃시장에서는 뒤에 열거된 꽃들은 찾을 수 없다. 혹여나 희박한 확률로 찾아낸다 해도. 아니, 이게 정말 내가 알고 있던 그 꽃이 맞아? 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종자가 개량 되었기 때문이다. 꽃시장으로 출하되는 꽃들은 리시안더스, 알스트로메리아, 라넌큘러스, 알륨등 하나같이 생소한 것들 뿐이다. 장미도, ‘장미'라는 하나의 품종만 있는 것이나 아니라 오션송, 쿨워터, 어피니티, 샤만트 등 어림잡아도 수십여종 이상으로 역시나 모두 영어나 라틴어 이름을 가지고 있다. 꽃꽂이의 용도 그러니까 절화로 사용되는 꽃들은 대부분 그 채로 수입이 된 것이거나 씨앗만 들여와 우리나라에서 키우는 외래종이다. 들판에서 피어난 꽃들은 잘라내면 대부분 하루이틀 내에 시들지만 이렇듯 종자가 개량된 꽃들은 물이 주는 양분만으로 최소 열흘 정도는 거뜬히 살아 있을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가 곁에 두고 볼 수 있는 꽃은 아주 오랜시간 동안 연구와 개발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애초의 지구에는 없던 꽃들이다. 이 말의 뜻은 이렇게 씨앗이 되는 단계부터 적지 않은 비용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키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씨앗을 뿌리고 기르는, 농부들의 노동이야 헤아릴 수 있을까. 게다가 일년 내내 꽃이 필 수 있는 높은 온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하우스의 보일러는 쉴 새 없이 돌아가야만 한다. 기름과 전기기 적지 않게 필요하다. 한 송이의 꽃에는 꽃 농부의 땀과 노력은 물론 과학자들의 인내와 에너지 자원까지 모두 총체적으로 깃들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수고와 노력은 오히려 꽃의 가격이 올라가게 하는 원인이 된다. 나 또한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떠나서 생각해 보면 과연 오며가며 그렇게 쉽게 꽃을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약간은 억지스러운 꽃들이 생겨나는 지도 모른다. 예를들면 프리저브드플라워나 드라이플라워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것 역시 이 나름의 가치와 매력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호가 폄하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다만, 플로리스트로서 아쉬운 점은 생화가 비싸다는 인식 때문에 드라이플라워가 대안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흔히 비싸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개인적인 주관으로 각자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는 그럼에도 꽃을 사고 또 누구는 그렇기에 꽃을 사지 않는다. 대체, 꽃의 매력이란 무얼까. 우선은 ‘살아 있음'이 아닐까 한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먹이고 입히고 어르고 달래고, 대체 왜 이렇게 까지 해야하나 싶지만서도 살아 있는 그들과 교감하며 함께 뒹굴며 나누는 정이야 그 어떤 것에 비할 수 있을까 싶다. 물론 꽃 몇 송이가 그 만큼이야 할까만은 그래도 ‘반려식물'이라는 말이 흔해지는 요즘은 이에 빗댄 설명이 영 설득력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생화와 말린 꽃의 가치가 나뉘지 않나 한다. 생화는 살아 있다. 숨도 쉬고 물도 마시며 나의 수고에 따라 며칠이겠지만 더 오래 살게 할 수도, 그리고 반대의 결과도 만들 수 있다. 또한 꽃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곁에 머물며 온전한 생기를 선물해 준다. 당연히 말린 꽃에서는 이런 온기란 찾기 어렵다. 생화가 더 비싼 이유는 이 ‘살아 있음에 대한 가치’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기호에 따라 가치 두기를 달리한다. 흡연자는 담배 한 갑으로 하루가 평안할 수 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은 두 세시간 정도의 각성을 유지해 주거나 카페에서 누군가와 대화할 때 분위기를 더욱 유연하게 해 준다. 책 한권으로는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며칠을 흥미롭게 보낼 수 있고 좋아하는 가수의 CD 한 장을 사서 며칠을 귀호강 할 수도 있다. 맥주 한 캔은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고 수면에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것에, 어느 정도의 주저함은 있을지라도 거의 매일 일정부분 만큼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그런면에서 꽃은 단 한송이라 할지라도 일주일을 머물며 내게 만족감을 줄 수 있으니 어찌보면 효용적인 면에서 제법 괜찮은 편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꽃에 더욱 관대해 질 수 있을까. 예전 내가 처음 꽃을 할 시기가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될락말락, 그쯤이었다. 당시엔 2만불 그리고 그것을 훌쩍넘어 3만불 시대에 대한 기대는 온통 장미빛 이었다. 왠 뜬금없이 국민소득 얘기인가 싶을텐데, 당시엔 우리가 선진국 반열에 드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컸고 그에따라 다양한 직업들도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플로리스트가 될 꿈을 꾸며 이 직업 자체에 대해 늘 관심을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마침 신문에 ‘앞으로 우리나라 소득이 높아지면 꽃에 대한 수요도 늘고 플로리스트라는 직업도 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류의 기사를 본 것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 듯 소득 3만불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꽃을 사지 않는다. 소득이 늘 수록 더 넓은 집과 더 좋은 차와 더 비싼 옷을 사지만 꽃은 사지 않는다. 그러나 소득이 1만불일 때 꽃을 사던 사람은 물론 여전히 꽃을 산다. 꽃을 사고 사지 않고는 소득의 수준 과는 그리 큰 연관이 없었던 것이다. 꽃은 경제가 아닌 문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생존에만 필요한 절대적인 것들에 국한되어 돈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그런 사회라면 얼마나 갑갑할까 상상해 본다. 먹는 것과 입는 것, 생활에 필요한 것 외에는 어떠한 지출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 말이다. 반면 꽃을 사는 것이 일상적인 곳이라면 한층 느슨한 사회라는 뜻일 것이다. 일주일에 3천원 쯤 장미 한송이를 사는 것이 용인되는 사회가 된다면 지금 보다는 훨씬 서로가 서로에게 여유를 가지고 대할 수 있지 않을까. 넉넉하게 살아서 꽃을 사는 것이 아니라, 꽃을 사니까 넉넉해 지는 것. 내가 바라고 꿈꾸는 세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만큼은 꽃집에 한번 들러 보는 것은 어떠실지.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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