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강의 발원지를 찾아가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 출연자들이 갖은 고생을 하며 찾아낸 곳은 보잘 것 없는 작은 샘 이었다. 돌들과 나무 틈, 그곳에서 끊임 없이 퐁퐁 솟아나는 가는 물줄기가 한강은 물론 낙동강까지 만들어 내다니, 신기한 장면이었다. 작은 시작에 불과 했던 일도 긴 시간과 과정을 거치며 처음 기대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지닌다.
꽃을 처음 시작했던 지방 도시의 평범한 꽃집. 그곳은 나의 꿈이 솟고 자라던 작은 샘 이었다.
그저 경험 없는 파트타이머에 불과 했기에 할 수 있는 건 쓸고 닦는 것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곳으로 향하는 시간이 무척이나 기다려졌다. 꽃을 다듬고, 작은 꽃다발을 포장하며 나의 능력치를 조금씩 쌓아가던 때 였다. 대학은 시원하게 그만두었겠다, 잉여의 시간은 오로지 꽃과 관련된 혹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배우는데 보냈다. 많이 불안했지만, 매일이 설렜다.
그곳에서 일을 한지 6개월 혹은 7개월 쯤 흘렀을 때였다. 사장님께서 넌지시 꽃집에서 일을 해보니 어떠냐 물으셨다. 늦은 밤, 무작정 이곳의 문을 열고 들어와 꽃을 해 보고 싶다는 나의 조름을 받아 주셨던 분이다.
꽃이요? 좋죠. 일도 재밌고 꽤 오랜시간, 어쩌면 사장님 처럼 평생 이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도 들어요.
대답을 들으시고 그분의 눈빛에서 반가움과 염려가 반반씩 차 오름을 느꼈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꽃을 한답시고 대학까지 그만둔 나를 진심으로 염려해 주신 분이다.
네가 지금처럼 우리와 오래, 함께 있다면 그건 나로서도 고마운 일이야. 하지만 평생 꽃을 할거라면 제대로 배워 보는 것이 어떨까. 여유가 허락한다면 짧게라도 해외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진심을 담은 충고였다. 어머니 뻘 연배로 적지 않은 나이셨지만 새로운 것을 배움에는 인색함이 없는 분이었다. 그 무렵, 본인 역시 꽃과 관련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셨고 전시회나 박람회도 자주 찾으셨다. 그리고 틈틈이 나를 데려가 주시기도 했다. 전시회에서 보는 꽃들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나 다양할 수 있구나, 나의 생각과 시선이 한껏 자라나던 때였다.
외국이라, 왠지 그 말만 들어도 가슴 한켠이 두근두근 하는 것만 같았다. 유학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가까운 일본 정도는 가볼 요량이었다. 우리나라의 초기 꽃 디자인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전통 꽃꽂이인 이케바나 그리고 독일식 유러피언 스타일을 접목하여 당시 제법 꽃 문화의 선진국을 달리고 있던 터였다.
유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본과 독일을 중점적으로 알아 보았다. 당시에는 소수의 몇몇 분들께서 독일 현지에서 ‘마이스터’를 취득하고 오셨고 이 분들이 중심이 되어 우리나라의 꽃 문화를 이끌 때였다. 이 때문인지 독일 유학은 마치 ‘정통파’로 분류되는 분위기 였다. 하지만 독일은 낯설다. 나는 독일어를 한마디도 할줄 모르고.
반면 일본은 가깝고 상대적으로 친숙하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직업전문학교와 전문사라는제도가 있어서 졸업 후 취업이나 학력에 대한 보장이 용이했다. 틈틈히 취미로 배워둔 일본어도 영 쓸모가 없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방향을 잡고 학교를 알아 보고 있는데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내가 찾은 일본 화훼전문학교의 많은 강사분들이 영국의 특정 학교를 수료했거나, 영국 연수 이력을 무척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이나 우리나 꽃 하면 독일식 스타일, 독일 유학을 가장 우선시 했는데 이것이 살짝 영국으로 비켜가고 있던 즈음이었다. 독일이 정통인건 알겠는데, 그들의 도제방식을 불편해 하거나 틀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디자인을 원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영국이 부각된 것이다. 그러니까 독일은 1세대, 영국은 뉴웨이브 쯤 될까?
왠지 나의 프리한 성격상 영국이 더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영어권이니 한마디도 못하는 독일어 보다 파인 땡큐 앤유라도 하는 영국이 더 메리트가 있겠지. 그래 이왕 유학가기로 한 거, 괜히 일본까지 가서 영국에서 배운 일본 선생님한테 배울 필요가 있나 그냥 바로 영국으로 가면되지 라는 제법 심플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심플하지가 않지만 말이다.
영국으로 방향을 정하면서 학교는 이미 선택되었다. 런던에서 기차로 삼십분쯤 거리에 있는 기숙학교 였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6개월 과정 동안 재료비를 포함한 수업료 그리고 기숙사비가 결코 만만할리 없었다. 사실 부모님께 기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자퇴한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아버지와는 일찌감치 골이 깊었고 조금 더 편하게 지내던 어머니에게 나의 목표에 대해 털어 놓았다. 자식의 꿈을 지지하던 어머니는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하셨다. 나 또한 무엇이라도 해야 했기에 크진 않지만 꽃집에서 받은 월급을 차곡차곡 모았다. 딱히 돈 쓸 곳이 없을 때라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었고 부모님께 일종의 노력 점수라도 받고 싶었다. 무엇보다, 대학을 자퇴했으니 그 등록금이 보존되었다는 것을 은연 중에 자주 어필했다. 지금 이 비용을 들여 영국에서 공부한 후 취업하는 게 남은 대학 3년을 마저 다니고 취업하는 것 보다 기회비용 면에서 훨씬 효율적이라고. 어쨌거나 이 말은 현실이 되긴 했다.
당시엔 유학을 간다는 생각에 들떠 이것저것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백방으로 돈을 빌렸을 부모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한 마음 뿐이다. 자잘한 얘기들 까지 털어 놓으면 신파로 흘러갈까 여기서 덮어 두지만 부모님이나 나나, 마음을 한껏 졸였던 때다.
어쨋거나 학비는 이래저래 빚을 통해 해결되어 가고 있는 눈치다. 하지만 아직 한가지 문제가 더 남았다. 지방에서 유학에 대한 정보를 얻는 다는 것은 상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영국은 미국이나 캐나다 등에 비해 유학 업무를 해주는 곳이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 점을 짠 하고 흑기사처럼 해결해 주신 분이 나의 은인, 일하던 꽃집의 사장님이셨다. 일전에 당신의 시동생께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었는데 그 때 업무를 맡아준 유학원 대표님께서 일처리를 무척 잘해주셨다는 것이다. 소개해 줄테니 한 번 만나보라고 하셨다. 이후 유학원의 도움을 받게 되자 행정적인 부분들도 빠르게 해결이 되었다.
과연 인연이란게 무얼까, 운명이란게 무얼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 둘 다를 깊이 믿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달리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다. 막연히 꽃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늦은 밤, 우연히 지나던 꽃집을 불쑥 찾아들어가 한달 뒤 부터 일하게 해 달라고 했다. 찾아간 곳이 거기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다른 곳에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듯 톱니가 맞춰 돌아가듯 시간의 낭비 없이 착착 되어 갔을거라 생각되진 않는다. 그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난 다는 것, 그 사람이 나에게 선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더더구나 어려운 일이다.
그때, 까까머리인 채로 꽃집의 문을 열고 들어와 꽃을 해 보고 싶다고 한 것은 나의 용기에 불과했고 그 용기를 끌어준 것은 운명이며 그 분을 만난 것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었다.
그렇게, 나의 작은 샘에서 일한지 일년이 넘고 다시 겨울이 되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조그만 꽃집이나 하나 했으면 좋겠다는 꿈은 이제 다른 방향으로 커 가고 있었으며 이것을 위한 준비는 모두 끝이 났다. 작은 샘에서 차오른 물은 그곳에서 고이고 넘쳐 결국, 멀리 흘러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