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언 Aug 19. 2021

처음, 그 시작에 관하여

왜 꽃이었냐는 질문이 가장 어렵다. 지금 이 순간도 백지 위에 ‘왜 꽃이었을까’를 느리게 톡톡, 자판으로 두드린 후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그때의 시간들을 되돌아 본다. 하지만 역시,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원체 생각이 많은 편이라 이 일이 무언지, 할 수는 있을지 고민하고 걱정했던 기억들은 한가득 이지만 꽃이란 것 자체를 떠올리게 한 가장 근원적인 이유, 그 맨 처음에 관해서는 도통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때, 스무살. 공대에 입학했다. 의심하지 않았고, 고민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놓여진 길 처럼 뚜벅뚜벅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줄 알았다. 어쩌면 그런 시절이었다. 수능점수와 내신에 맞추어 그럭저럭한 대학의 공학계열 중 그럭저럭한 과를 택했다. 사람들은 잘했다고 했고 축하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정해진 길로 왔듯, 앞으로의 길 또한 졸업과 취업이라는 곧고 단순한 모습으로 정해져 있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생각보다 길은 다양했고 그때 내가 선택했던 길, 그것은 나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칠판 가득 빼곡한 알 수 없는 공식들, 차가운 기계들과 매캐한 실험실의 공기, 그리고 어딘가 삭막하고 무거운 분위기. 입학의 설렘은 짧았고 캠퍼스는 공허했다. 어느 것 하나 마음 붙일 것이 없었고, 이것을 깨닫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시 돌리고 싶었지만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바꾸고 이끌어가기엔 어리고 부족하다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겁이났다. 지금껏 내가 주인이 되어 오롯이 나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피하고 미루며 그냥 다, 대학 1학년은 고민과 방황으로 보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년여의 시간을 의미없이 보낸 후 병역을 위해 입대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하지만 그 느림은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나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 되어 주었다. 군 생활의 끝에서 다시 결정의 시간이 찾아왔다. 공대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감내할 수 있는 길이 아니란걸 이미 충분히 알았기 때문이다. 다시 수능을 보고 인문학 계열로 진로를 바꿀까도 생각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끌리지도 않았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할 때 기쁨을 느끼는지 공책 한 권에 적어나갔다. 어렸을 때 부터 만들고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 미대도 생각했지만 데생부터 시작하기엔 늦은 감이 있고 애초에 대학이란 것 자체에 회의를 가진터라 굳이 다시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접은 터였다. 그렇다면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되고, 만들고 꾸미는 분야여야하고 기계와 같은 차가운 질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공대에서 알았기 때문에 부드럽고 따듯한 소재들을 다루는 일이 길 막연히 결론 짓게 되었다. 결국 그렇게 다다른 생각이 꽃이었다. 물론 미디어에서건 주위에서건 내게 꽃이라는 단서를 주었던 어떤 계기가 있었겠지만 그건 미리 말했듯 아무리 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우선은 그렇게 내 미래에 대한 키워드를 간직했다. 그리고 나의 선택이 맞는 것인지 일종의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다. 군에서 마지막 휴가를 나오던 날 운명처럼 그 기회가 나에게 찾아왔다. 부대 복귀를 앞두고 친구들과 늦은 시간까지 시내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어두운 골목에 환하게 불이 켜진 작은 꽃집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친구들 무리에서 빠져나와 홀린듯 그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저, 곧 제대하는 군인인데요. 혹시 직원이 필요하시다면 한달 후 이곳에서 일을 해 볼 수 있을까요.” 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열시가 넘은 시간, 술도 마시지 않은 멀쩡한 까까머리 청년이 한달 후에 취업시켜 달라는 조름을 어떻게 받아 들이셨을까. 어머니 또래의 사장님은 당황스런 기색을 감추고 그렇게 하라고, 한달 후에 오라고 말씀하셨다. 내게 이런 운명적 일이 일어나는 동안 친구들은 사라진 나를 찾아 난리가 났었다. 그렇게 한 달 후. 제대하던 그날 그 꽃집을 찾아가서 첫 일을 시작했다. 청소부터. 때문에 나는 처음으로 꽃 일을 시작한 그날을 잊지 못한다. 2001년 12월 7일. 그날은 나의 제대 날이자 플로리스트로 첫 발을 내디딘 날이다. 그렇게 작은 꽃집에서 하루 이틀, 열흘 한달이 갈 수록 일에 대한 희열이 나로하여금 확신에 차게 했다. 대학은 더 이상 돌아가야할 이유가 없었다. 꽃일을 한지 두어달 쯤 되던 날. 자퇴서를 제출하고 정식으로 학교를 떠났다. 그때의 심정은 내 삶에 불필요한 한 덩이를 떼어 놓는 느낌이었다. 대학을 갈 때와는 달리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았고 그 누구도 잘 했다고도 하지 않았다. 상관 없었다. 나는 아무런 미련 없이 대학을 그만두었고 기쁜 마음으로 고졸이 되었으며 본격적으로 플로리스트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이후의 삶이 안정되거나 평탄했던 것 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학교에는 계속 미련이 남아 서른살 무렵까지 다시 갈까 말까를 고민했고 수익은 꽃을 시작하고 십년이 넘도록 단 한번도 ‘대한민국 직장인 평균연봉'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꽃을 한 이십여년 간 5년에 한 번 꼴로 슬럼프가 찾아왔고 그 중에 두어 번은 이것만 아니면 어떤 일을 해도 괜찮아 라는 극악한 생각이 들 만큼의 심각하게 빠져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일을 여전히 하고 있고 또 여전히 좋아하는 이유는, 나와 잘 맞기 때문이다.

플로리스트를 선택하기 이전에 어떤 길을 가야할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어쩌면 그 고민의 시간은 알지 못했던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이었고 신중히 결정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토대가 되어 주었다. 어쩌면 나의 시작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의 시작에는 어떤 계기도 이벤트도 없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떨 때 행복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 그저 밍숭맹숭하게 하루종일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 뿐이다. 그리고 참으로 지리한 고뇌 끝에 다다른 것이 바로 꽃이었다.

한편 그때의 고민이 얼마나 치열했던가 살풋 웃음이 나기도 한다. 나의 주변엔 꽃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늘 팍팍히 살아가던 우리 집에는 평생에 단 한번도 꽃이 놓여진 적이 없었다. 나 역시 제 돈 주고 꽃을 사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내가 플로리스트, 게다가 그 결정을 칙칙하기 그지 없는 군대에서 하다니! 정말 귀 닫고, 눈 닫고, 입 닫아 내린 결과가 아니었던가 싶다.

나에게 왜 플로리스트가 되었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은 무릎을 탁 치는, 반짝이는 에피소드를 기대한다. 플로리스트라는 흔치 않은 직업, 게다가 남자라는 성별까지 더해졌으니 오죽할까. 그러고 보면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고 있는 사람들 또한 이러한 ‘이벤트'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 이거야!’하며 마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듯이 짠 하고 내게 맞는 직업이 찾아와 줄 것 같은 기대 말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테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서건 충분히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 주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깊게 침잠하여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거창하게 나를 찾아 떠난다는 말은 차치하고 그저 나만 생각하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이기심을 발휘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에 닿아 천천히 부유한다면, 공책 한 페이지 쯤에 내가 좋아하는 것 그리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쯤은 적어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길로 갈 수 없겠지만 적어도 싫어하는 길 위에서 꾸역꾸역 버텨내지 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엔, 세상에는 재미있는 일들이 참 많거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