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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Sep 06. 2021

가장 행복했던 시간


긴장이 되지 않을리가 없었다. 나는 떠난다. 그것도 시간과 날짜를 거슬러 지구 반대편 까지. 대한민국을 벗어 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여권을 만들고, 여러장으로 된 비행기 티켓을 받은 것 또한 그때가 처음이었다. 티켓에 찍혀진 도착시간이 출발 후 불과 몇시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영국이 생각보다 가까운줄 알았지만 이유는 현지 시간으로 표기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소한 것 조차 나는 알지 못했다.

부모님과 진한 포옹을 하고 새벽 같이 집을 나섰다. 공항버스를 타고 김해공항으로, 다시 인천으로 그리고 북극항로를 가르는 중이었다. 이렇게 큰 비행기를 타 보는 것 또한 처음으로 묵직한 중량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아래에 펼쳐진 눈인지 구름인지 위로 태양빛이 가르는 것이 보였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 구름 위를 날으는 내 마음이 구름 위를 걷는 것인지, 그렇게 멍한 열시간이 흘러갔다.

저렴한 항공권이라 환승을 해야만 했다. 오는 비행기 안에서 옆으로 나란히 앉았던 분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한 사람은 이곳, 네덜란드가 목적지 였고 누구는 독일이라 했고 다른이는 생각나지 않는다. 나 역시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서둘러 공항 안을 누볐다. 그들과의 인사가 당분간은 나눌 수 없는 정겨운 우리말이라는 것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작은 비행기로 갈아타고 서야 비로소 실감을 했다. 그 비행기 안에선 한국인은, 아니 동양인도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긴장과 설렘을 안고 비행기는 낮게, 낮게 내려 앉았다. 이미 시간은 밤이다. 공항이 도시 가까이 있어서 인지 차들이 길을 따라 일렬로 움직이는 모습이 비행기 안에서도 또렷이 보였다. 이제 정말, 도착이었다.

짐을 찾고 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누군가 손으로 대충 쓴,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었다. 학교 측에서 보내주신 분이었다. 물론 이에따른 비용을 미리 지불하긴 했지만 처음 닿은 다른 나라, 그곳의 국제 공항에서 길을 잃지 않은 건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과묵한 영국인 답게 차 안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적막을 깨기 위해, 그리고 한 마디라도 나의 영어를 테스트 하기 위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물어 보았다.

“It’s Saturday. 잇츠 사터데이.”

내가 도착한 날, 1월의 첫 주였던 그날은 '사터데이'였다.

한 시간이 조금 걸리지 않아 도착을 했다. 마지막 이십분 쯤은 굽어진 좁은길, 가로등 하나 없는 완전한 암흑의 시골길을 달려서 였다.

자동차가 완전히 멈추고 차 문을 열었던 그 때, 코 끝에 닿았던 차갑고 신선한 영국 시골의 공기가 무척이나 상쾌하게 느껴졌다. 마치 비행기 안에서 내내 했던 걱정과 고민들을 씻어주는 것 처럼.

보기 보다 행동이 빠른 기사분께서 트렁크에 내 짐을 꺼내 벌써 도로위에 내려 놓았다. 지갑 안에서 꼬깃 꼬깃한 얼마의 돈을 꺼내 팁이라며 드렸다. 그 분은 조금 당황하는 눈치더니 이내 팁을 받고는 thㅐ큐 하며 그의 차를 몰고 다시 그 적막함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팁을 준 이유는, 캐나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친구가 외국 가면 꼭 팁을 주라고, 그게 예의라며 근엄하게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영국은 팁 문화가 없다.

주섬주섬, 그가 내려두고 간 나의 짐을 들고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완전한 어둠으로 인해 분간 조차 어려웠다. 어느새 왔는지 나이가 지긋한, 하지만 왠지 도도하고 어려워 보이는 귀부인 께서 나를 맞으러 나왔다. 눈은 그렇지 않은데, 입꼬리만 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고 있었다. 어렸을 적, 소공녀등의 만화에서 보았던 전형적인 기숙사 사감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내 방의 위치를 대충 일러두고는 오리엔테이션은 모두가 도착하는 월요일에 할 것이니 우선은 편히 쉬라고 했다. 학교내 유일한 남학생으로 홀로 일인실을 이용하게 되었다. 방은 정말 작았다. 서양 사람들은 덩치도 크고 집도 크고, 모든게 다 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모든 것이 작았다. 작은 키인 내가 누워도 침대의 길이가 딱 맞았다. 샤워실은 공중전화 부스만 했다. 책상은 가로세로 세뺨 정도 그리고 엉덩이가 꼭 끼는 의자. 이 모든 것이 다 였던, 좁은 공간 안에 이 모든 것이 다 있던 마법 같은 방 이었다.

습관대로 신발은 벗어 문 앞에 둔채 잘록한 침대에 몸을 뉘였다. 방은 노란 백열구의 불빛이 밝혀 주고 있었다. 감사했다. 꿈을 찾아 내린 결정, 쉽지 않았던 과정, 그 시간들을 뚫고 이 시간, 이 공간에 들어왔다. 나에게 도움을 주신 분들, 내가 염려를 끼쳐 드린 분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앞으로의 시간들을 헛되이 보내선 안되었다. 좁은 방도, 낡디 낡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내 등에 닿은 냉기 마저 감사하고 과분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러한 채로 편치 않은 첫 밤을 보냈다.

주말 동안 속속, 동기들이 도착했다. 일본인이 가장 많았고 홍콩과 태국 등에서도 왔다. 전체 학생은 열명 미만이었고 나는 유일한 남학생이자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간단한 학교 설명과 생활 수칙등을 듣고 정식으로 과정이 시작되었다. 열명이 채 안되는 우리는 과정에 따라 두 세개의 그룹으로 다시 나뉘었고 전담해 주시는 선생님을 배정 받았다. 수업은 아침 9시 30분에 꽃을 다듬는 것으로 시작하여 일과가 끝나는 5시 무렵까지 꽃을 꽂고 다시 다 뽑았다가, 새로 꽂았다가, 다시 뽑아 다른 것을 만들고, 다시 뽑았다가 꽂기를 반복했다. 정확히 11시면 모두가 지키는 15분 동안의 티타임이 있었고 한 시간의 점심시간, 그리고 오후에는 선생님이 재량껏 허락하는 휴식시간이 있었다.

여기가 무슨 사관학교도 아니고, 일정이 너무 비인간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꽃이 좋아서 모인 사람들에겐 이곳이 바로 천국이었다. 지금껏 단 한번도 봐오지 못한 꽃들이 학교의 냉장 창고 안에는 늘 가득이었고 우리는 하루종일 꽃을 꽂은 것도 모자라 수업 때 사용했던 꽃들을 기숙사 방으로 가지고 와 다시 해체하고 꽂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영국의 겨울밤은 길었다. 5시 무렵이면 노을도 없이 해가 지기 시작한다. 이 때쯤이면 시내의 상점들도 모두 문을 닫는다. 새벽까지 불야성이던 우리나라와는 달랐다.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거리엔 적막만 남는다. 가로등도 별로 없고, 길가 집들의 창을 통해 나오는 노란 백열등 빛 만이 간간이 보일 뿐이었다. 두 달쯤의 시간이 지나니 이곳에도 봄이 오기 시작했다. 봄의 시작은, 영국 개나리가 가장 먼저 알려주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위도대라 그런지 들판에 피는 꽃들은 향도 생김도 모두 닮았다. 개나리 다음은 수선화가 지천으로 보였다. 이 무렵 부터 이곳에서의 생활도 익숙해 져서 학교의 공용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기도 하고 마을 도서관에서 꽃과 관련된 책을 빌려 보기도 했다. 특히 학교 주변에서 방목하는 양떼와 당나귀, 말 들도 많았는데 간식으로 받은 사과나 포도를 들고 그들을 자주 찾았다. 그리고 이때, 신입생들도 들어왔다. 이번엔 영국인 학생도 있었고 한국 학생들도 많았다. 나는 마치 선배인냥, 이곳의 생활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 주었다. 겨울 동안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학교의 모습들도 눈에 들어왔다. 1800년대에 지어진 건물로 영국 건축물들이 모두 그렇듯 곳곳이 낡긴 했지만 그 만큼 시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정문을 들어서면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하던 모습을 본딴 정원이 있고 뒤로 돌면 축구장 크기 쯤은 훌쩍 뛰어넘을 너른 잔디밭이 펼쳐진다. 둘레의 개천을 따라 걸으면 이내 나무가 우거진 숲이 펼쳐지는데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피터 래빗, 비밀의 정원 등에 나왔던 모습들인 것만 같다. 봄은 학교 내부 뿐만 아니라 이곳 전체에 내려 앉았다. 꽃 시장도 활기를 띄었고 지역에서 관리하는 공원 규모의 정원들도 손님들을 맞았다. 나를 담당하셨던 선생님은 무척이나 활동적인 성격이라 틈틈히 우리를 데리고 지역 곳곳의 정원, 꽃시장, 화훼 용품점, 박물관 등을 구경 시켜 주었다.

꽃을 하는 동안, 아니 나의 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는가 묻는다면 주저 없이 이곳에서의 시간들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클수록 더 이르게 찾아 오는 것만 같다. 함께 과정을 시작했던 이들의 마음도 같았다. 누구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다고 했고, 누구는 되든 안되든 런던에서의 취업을 시도해 본다고 했다. 또 누구는 다른 곳에서 더 배울거라고 했고 아직 이도저도 결정하지 못한 이는 학교에 좀 더 남아 다른 과정을 이수하기로 했다. 많지도 않은 인원인데 생각과 고민은 제각각이었다. 나 또한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돌아간다면 다시 제 자리일 것이다. 하지만 런던에서의 취업은 결코 녹록지 않다. 그러던 차에 마침 런던에서 일을 해볼 기회가 생겼다. 런던의 어느 플라워샵에서 주말에 일할 실습생을 보내줄 수 있냐는 제의가 학교로 왔고 감사하게도 선생님께서 나를 추천해 주신 것이다. 매주 토요일, 시급도 식사도 제공되지 않는 단 네번의 실습이었지만 이 경험은 나의 마음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에서의 마지막은 취업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냈다. 수업 시간에 만들었던 작품들을 토대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인터넷을 뒤져 양식에 맞게 이력서도 작성했다. 포트폴리오의 내용도, 이력서에 쓸 경력도 많지 않았다. 그저 담을 것은 정성 뿐이었다. 가장 많은 공을 들인건 명함이었다. 나는 이것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두꺼운 종이에 이름과 연락처를 인쇄한 후 뒷면은 압화(press flower)를 만들어 붙이고 코팅지를 덧대었다. 압화는 두꺼운 책속에 끼어진 꽃이 마르기 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자연스레 정성과 시간을 녹여야 했다. 내가 봐도 그럴듯한 ‘압화 명함’이었다.

이제, 학교와는 이별을 고할 시간이 되었다. 이미 나를 기차역까지 데려다 줄 택시는 도착을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사용했던 작은 책상과 내 몸을 뉘였던 작은 침대를 쓰다듬었다. 모든 것이 아쉬었다. 삐걱거리는 문도 좁은 복도도. 나의 눈과 마음에 한껏 담으려 했다. 그간 함께 해준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직 남아있던 동기들과도 악수를 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Is that it? 이게 다인가요?”

“Yes, that’s all 네 이것 뿐입니다.”

택시 기사분께서 흔쾌히 내 짐을 들어 트렁크에 넣어 주셨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떠날 때의 짐도 단촐했다.

이제 정말 작별이다. 안녕 학교, 안녕 선생님들, 앨리스와 피터 래빗과 그들이 숨어 있을 학교의 숲과 양떼와 당나귀들 모두, 모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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