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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Nov 18. 2021

나는 런던의 플로리스트 (2)

그의 이름은 사이먼이다.

영국인 치곤 크지 않은 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동안의 얼굴과는 달리 과묵하고 어려운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편하게 ‘헤이, 싸이’하고 불렀지만 나로선 감히. 꼭 불러야 한다면 그리고 대답을 해야 한다면 무조건 Sir을 붙여야 마음이 편했다.

노팅힐에서 일하는 틈틈 ‘제인패커’라는 곳에서 실습생으로 일했다. 사이먼은 바로 이곳, 제인패커의 헤드 매니저였다.

실습생(work experience)은 인턴의 인턴쯤 된다고 할까, 보수도 없고 소속도 없다. 크고 유명한 숍에는 처음 부터 정직원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에 경험이 없는 초보 플로리스트라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첫 단계였다.

노팅힐의 작은 숍에 파트타임으로 취업이 된 후, 조금 늦게서야 ‘제인패커 Jane Packer Flowers’에서 실습생 제안을 받았다. 예전에 제출한 이력서를 보고 뒤늦게 연락을 해 온 것이다. 거절할 수 없었다. 여기, 제인패커는 플로리스트가 되길 꿈꿔오던 때 부터 동경하던 곳이었다. 비록 실습생이라 할지라도 내가 꿈꿔온 숍에서 꼭 일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그렇게 휴일도 없는 채로 파트타임과 실습생, 그렇게 두가지 일을 두 곳의 다른 장소에서 병행하게 되었다. 예상하다시피 실습생이 할 일은 그저 쓸고 닦는 것이다. 꽃이 들어오는 날이면 산더미 같은 꽃들을 다듬고 화병을 씻어 직원들이 일을 할 때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꽃집에서의 루틴은 어디나 비슷하다. 아침에 출근해서 작업실을 둘러보면 온갖 손을 대야할 것 투성이였다. 실습생에게는 특별히 말을 걸어주는 이도 없었다. 미안해서 였을 것이다. 그들 역시 직원인데, 최소한의 수고비 조차 받지 못하는 실습생에게 일을 시킨다는 것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저 무엇을 할까요, 무엇을 도와줄까요. 내쪽에서 물어보면 알려줄 뿐이었다. 그렇게 묵묵히 일하는 것이 좋았다. 어차피 깊이 있는 영어는 어렵기 때문에 사사로운 것들을 계속 물어 본다면 그건 나도 곤란한 일이다. 

어쩌면 투명 인간이 될지도 모를 그 공간에서 그림자 처럼 존재를 채워갔다. 그러던 어느날 사이먼이 나를 불렀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있나요? 한국은 언제 돌아갈거죠?”

“노팅힐에서 파트타임 플로리스트로 일하고 있고 당분간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은 없습니다.”

“우리에겐 데일리 플로리스트가 필요합니다. 데일리는, 매일 출근은 하지만 정직원은 아닙니다. 급여는 시급으로 책정되고 일한 만큼 받게 됩니다. 정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휴가와 보험은 없습니다.”

이건 제안 인가 설명인가. 워낙 사무적으로 말해서 나에게 제안을 하는지도 몰랐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재차 확인을 하고 서야 ‘We want you.’라는 시원스런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노팅힐에서 일을 시작한지 석달 남짓이라 그만둔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 쉬울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야했다. 다행히 그곳에서의 동료들은 흔쾌히 나의 성공을 기원해 주며 마지막 근무 날에는 노팅힐의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함께 시간을 보내 주었다.

며칠 후, 본격적으로 제인패커에서의 근무가 시작되었다. 나의 주요 업무는 로라와 함께 셀프리지 백화점의 안내 데스크와 사무실, 매장 등을 꽃으로 꾸며주는 것이었다. 매주 로라가 꽃의 디자인을 정하고 그에 맞게 꽃 주문을 했다. 꽃은 늘 정해진 요일 새벽에 백화점 검품장에 도착해 있었고, 우리 둘은 백화점이 영업을 시작하는 열시 삼십분 전까지 정신 없이 꽃을 다듬고 꽂아 각각의 매장과 위치 마다 놓았다. 시원시원한 성격의 로라와는 마음도 잘 맞아 착착 작업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떨 땐 훨씬 이르게 일이 끝나 아무도 없는 백화점을 누비며 새롭게 내 걸린 옷들을 만져보고 걸쳐 보기도 했다. 어쩌면 CCTV로 보고 있었을 보안 요원들이 출동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엉덩이가 들썩들썩 했을 것이다. 백화점의 플라워 데코 업무를 마치면 본점으로 돌아와 밤 새 주문이 쌓인 꽃다발을 만들었다. 런더너들은 바구니 보다는 포장을 풀어 화병에 꽂을 수 있는 꽃다발을 훨씬 더 좋아했다. 우리는 손에 잡히는 대로 주문서를 확인하여 거기에 적힌 대로 고객이 원하는 꽃과 색을 바탕으로 상품들을 만들었다. 그렇게 완성된 꽃다발과 어렌지먼트들은 스콧과 제이크가 각각 자신의 배송차에 나눠 싣고 런던 각지로 전달되었다. 전해야 할 꽃이 많은 날은 그들을 도울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는 물론 내 차지 였다. 스콧과 제이크는 조수석에 ‘동양인 꼬마’를 태우고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둘은 스스로를 런던 토박이라 여기는 ‘코크니’였는데 나에게 수많은 코크니 속어들을 가르쳐 주었다. 어느날 제이크가 가르쳐준 코크니 슬랭을 작업실에서 쓰다가 사이먼에게 주의를 받은 적이 있다. 그 후론 ‘배우지만 사용하지는 않기로’ 속으로 다짐했다. 제이크가 서운해 할까봐서 였다.

주말에는 셀프리지 백화점 내의 분점에서 홀로 매장을 지켰다. 셀프리지 백화점 안에는 꽃 상품을 파는 플라워 파트와 식물을 파는 플랜트 파트, 두 곳의 분점이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손님이 적은 식물 매장, 플랜트 파를 맡게 된 것이다. 사이먼이 이 곳을 나에게 맡기며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다. 한편으론 나에대한 그의 신뢰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언젠가 이 점에 대해 사이먼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역시 그 답게, ‘주말 근무를 하려는 사람이 없었고, 혹시나 너에게 어려운 점이 생기면 플라워 파트에서 도와주러 갈 것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라고 아주 쿨하게 대답했다. 아닌게 아니라, 식물 파트는 손님이 많지 않았고 온다고 해도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메뉴얼에 따라 계산만 해 주면 되었기에 그리 어려운 점은 없었다. 간혹 까다로운 손님이 올 때면 플라워 파트에 매장 전화로 SOS를 보내면 주디, 혹은 나보다 영어를 훨씬 잘하는 일본인 플로리스트인 아키라가 한 달음에 달려와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제이미, 이리나, 앨런…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이름의 동료들이 이 이방인 플로리스트가 어려워 하거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늘 곁을 든든히 지켜주었다.

한 두 달쯤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사이먼이 나를 불렀다. 그리곤 기시감이 들 만큼의 비슷한 질문을 했다.

“지금 우리와는 데일리 플로리스트로 일하고 있는데 이 외에 또 하고 있는 일이 있나요? 그리고 귀국 계획은 있습니까?”

그와의 대화는 언제나 긴장되고 차갑다.

“다른 일은 하고 있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도 지금은 없습니다.”

미세하게, 그가 웃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풀타임 플로리스트 제안을 합니다. 주5일 근무와 이틀의 휴무, 하루 8시간 이상을 초과하여 일하게 되면 오버타임피(over time fee)를 신청할 수 있고 이는 급여에 포함되어 지급 됩니다. 휴가는 일년에 4주, 최대 2주 까지 한번에 다녀올 수 있습니다. 사회보장 보험은, 담당자가 다시 설명하겠지만 대략 급여의…”

자세하지만 나를 배려해 쉬운 단어들로만 채워진 문장들이 부드럽게 내 귀에 들어와 앉는다.

이미 그의 화법을 익힌 나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드디어 고대하던 정직원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두툼한 워크북과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자 사이먼이 직접 유니폼을 챙겨 주었다. 옷이 더 필요하면 조던에게 신청하면 된다고도 일러 주었다. 이제 더 이상 동료들과 드레스코드를 맞추기 위해 유니폼과 비슷하게 생긴 짝퉁 옷을 사지 않아도 된다.

사이먼과 미팅을 마치고 나오자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던 동료들이 박수를 치며 축하해 주었다. 역시 나의 단짝이던 로라를 비롯해 하루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리나와 앨런이 가장 기뻐해 주었다. 인도네시아 출신이었던 앨런은 누구 보다 나에 대해 마음을 써주던 좋은 사람이었다. 제이미는 ‘너무 빠른 것 같은데~’ 라며 농인지 일침인지를 가했다. 알고 보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어쩌면 나는 운이 좋은 편이거나, 사이먼이 지나치게 나를 좋게 봐주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침 배송을 마치고 온 제이크가 성룡인지 이소룡 흉내를 내며 축하해 주었다. 당시엔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그 정도로라서, 그리고 축하해 주는 마음이 진심이라서 용서해 준다만 잊지마, 나는 한국인이야.

이후 정직원이 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여전히 아침마다 로라와 함께 텅빈 백화점을 누볐고 매일 크고 작은 꽃다발을 만들었다. 동료들과 소통에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워낙 그들의 배려심이 깊었다.) 여전히 전화로 주문을 받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몇 번씩 용기를 내 전화를 받았다가도, 답답해 하는 고객을 달래며 가까이 있는 동료 아무에게나 헬프미를 날렸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때 즈음 나역시 사이먼을 ‘헤이, 싸이’ 하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 정도.

나의 영국 생활은 초기의 불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물론 이러한 삶이 영원히 지속된다 면야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우리의 삶에선 언제나 예기치 않은 일들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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