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두 번째 이야기. 탈영병(2부)
장병 정신교육을 준비하면서 김 일병이 지내온 그 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김 일병의 시선은 계속 바닥으로 향했고 말도 중간중간 끊어졌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큰 걱정을 덜어낸 듯한 작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김 일병은 부대에서 당했던 구타와 가혹행위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입대 당시 키는 180cm 정도로 컸지만 호리호리한 체구로 인해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일이 벅찼다고 했다. 삽질, 풀베기 같은 작업은 물론 훈련 준비도 손이 느리고 실수하기 일수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자연히 부대에서 선임들에게 잔소리와 꾸중을 듣는 횟수가 늘어갔고 이는 구타와 가혹행위로 이어졌다. 어느새 김 일병은 소위 말하는 고문관이 되어 있었다. 부대에서의 적응에 큰 어려움을 커지는 만큼 삶의 의지는 점점 떨어졌갔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느껴지자 이런 삶을 이어가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느껴졌고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결심을 수행할 좋은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경계근무를 서면서 오가는 길에서 보았던 큰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튼튼한 나뭇가지가 뻗어있어 줄을 매 감기에 알맞았다. 담벼락과 나란히 솟은 이 나무를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할 동반자로 점찍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을 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늘 모질게 괴롭히던 선임과 경계근무에 나서게 되었다. 근무 내내 선임의 폭언은 끊이지 않았다. 지옥 같은 시간이 흘러 겨우 근무교대를 하고 내무반에 들어올 수 있었다. 내부반 관물대에서 미리 준비했던 끈을 전투복 건빵 주머니에 얼른 쑤셔 넣고 나무가 있는 그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 걷지 않았지만 나무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준비한 끈을 묶기 위해 나뭇가지 위로 올랐다. 나무 위로 올라서니 아래서는 몰랐던 바깥세상의 밝은 조명이 나뭇가지 위를 비추고 있었다. '사회'라고 불리는 세상의 의 밝은 조명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김 일병은 그때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고 했다. 죽음이란 단어는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나뭇가지를 밟고 뛰어올랐다. 쿵하는 소리와 땅의 진동이 전투화를 신은 발끝에 느껴졌고 부대 담벼락은 이제 등 뒤에 있었다. 그 길로 버스터미널로 내달렸다.
버스 터미널에 다다르자 정신을 들었다. '아, 이제 탈영병이구나.' 짧은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온몸을 짓눌렀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언제라도 헌병대가 뛰쳐나올 것만 같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주머니를 뒤지면서 버스 시간표를 빠르게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손에 지폐 몇 장이 잡혔다. 그리고 바로 매표소에 가서 '가장 빨리 출발하는 차로 아무거나 한 장 주세요.' 매표소 직원은 '5분 뒤에 출발하는 버스예요' 하면서 대전까지 가는 승차권을 내밀었다. 그렇게 난생처음 대전이란 도시로 가게 되었다. 버스에 올라타니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이내 눈이 감겼다. 얼마가 지났을까. 버스는 목적지인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 터미널에 발을 내리니 모든 게 막막했다. 아는 사람도 없도 도움을 요청할 데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계속 좇기는 초조함은 시시각각 가슴을 짓눌렀다. 본가로 가자니 당장 헌병대에서 들이닥칠 것이 뻔하고 이제서 다시 부대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터미널 주위를 방황하던 때에 전봇대 모집공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직원 구함 / 숙식제공, 대전 000 나이트클럽’. 당시 필요했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밤에 근무해서 사람들 눈을 피해 일할 수 있고, 찬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잠자리와 따듯한 밥 한 끼 그리고 월급까지. 엉성한 군복을 입고 왔지만 지배인은 어디서 왔는지 뭐하다 왔는지 깊이 묻지 않았다. 그렇게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몇 년간 걱정했던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상하리 만치 아무런 일이 없었다. 소소한 불편만 참아내면 생황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탈영한 사실은 조금씩 잊혔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나온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살아는 계신지. 하나뿐인 아들이 없어졌다고 저녁마다 밥을 차려놓고 늦게까지 기다리시는 건 아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늘어나자 집으로 찾아갈 용기가 조금씩 생겼다. 힘겹게 고향집을 찾았지만 정작 집에는 낯선 이들만 가득했다. 가족 모두가 이사를 간 것이다. 동사무소에 가서 신분을 밝히고 가족의 이사한 주소를 물을 수도 없고, 주변 이웃에게 자신을 밝히고 가족일을 수소문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잊고 살았던 탈영병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눈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30대가 되고 나니 탈영병이라는 족쇄가 서서히 삶을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당장에 먹고사는 일은 문제가 없었지만 삐걱거림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운전면허증을 딸 수 없으니 자동차를 사는 건 불가능했고, 신분 확인이 필요한 부동산 거래는 아예 할 수 없었다. 20대 혈기 왕성한 시기가 지나 여기저기 몸이 아픈 곳이 생겨도 주변 동료의 의료보험증을 빌려야 겨우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은행 계좌를 만들 수 없어서 대출은 물론 적금도 할 수 없었고 카드 발급도 꿈꿀 수 없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그림자였다. 그래도 이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이 모든 어려움을 이해해주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정말 사랑했고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끝내 결혼식장에 함께 들어가지 못했다. 혼인신고를 할 수도 없었고 아이를 낳아도 아비 없는 자식이 되어버린다.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없는 문제가 결혼을 가로막았다. 사랑했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길로 대전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의 생활도 일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불심검문에 걸렸다. 근 20년간의 탈영병 생활이 순식간에 탄로 나 버렸다. 불심검문은 다른 범죄자를 찾으려 시작했는데 예상에도 없던 탈영병을 검거하게 되었다. 인생은 연속된 우연의 결과인가 보다.
김 일병의 이야기는 참으로 기구하고 또 안타까웠다. 긴 시간을 돌고 돌았는데 결국 도착한 곳은 처음 자신이 떠나온 바로 그곳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얼굴의 주름을 제외하면 소속도 군복도 계급도 모든 것이 18년 전 그대로였다.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김 일병은 앞으로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대해 나에게 계속 물어왔다. 부대에서 계속 근무를 하게 될지 아니면 군 교도소로 향할지 아니면 사회 교도소에서 복역을 하게 될지. 불안함이 여과 없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참고해서 충고해 줄 만한 유사사례가 거의 없을뿐더러 내가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 케이스는 너무 복잡했다. 현역 복무를 시키자니 40세가 넘은 나이도 문제였고, 복무기간 단축을 어떻게 적용할지도 문제였고, 사회인이나 다름없는 김 일병을 다시 교육시키는 방법도 문제였다. 그렇다고 교도소로 보내자니 고통스러운 삶으로써 충분히 죗값은 치렀다고 생각되니 그것도 못할 짓이었다.
"윗분들께서 김 일병에게 최선의 방법을 찾는다고 하셨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오늘을 푹 자둬.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다."
"네, 알겠습니다. 충성"
작은 안도감이라도 갖고서 침상에 눕길 바라는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 일병은 이내 경례를 하고 돌아섰다. 지금에서야 밝히지만 반말을 하는 것도 너무 어색하고 잘못하는 것 같았는데 경례까지 받으려니 영 가시방석이었다. 불편함을 끝내려 계원과 얼른 함께 부대로 복귀시켰다. 계원은 김 일병에게 '아저씨, 가요.'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아저씨 호칭을 쓸 수 있다는 게 그렇게 부럽기는 처음이었다. (병사들 사이에선 보통 다른 부대 병사들을 아저씨로 호칭한다.) 부대에서는 사단장님의 지시로 탈영병 가족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이 말을 해줄까 하다가 가족을 못 찾았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경우 받게 되는 충격이 더 클 것 같아 다음으로 미루었다.
김 일병을 돌려보내고 나니 눈앞에 일더미가 쌓여있었다. '(가칭) 탈영 방지 장병 정신교육'을 이제부터 하자니 막막했다. 계획에도 없던 일이라 일정이나 장소를 선정하는 것도 어려운데 이 교육을 들은 이들을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장의 '계획 보고서'로 작성해서 내일까지는 참모님 책상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고민만 하다가는 답이 없었다. 바로 부대 교회로 전화했다.
"충성. 목사님 공보장교입니다."
"네, 공보장교님. 무슨 일이십니까."
"다름 아니라, 사단장님께서 지시한 장병 정신교육 때문에 오전에만 교회 예배당 장소를 좀 이용할 수 있을까 해서요."
강당을 갖고 있는 부대는 거의 없다. 그래서 많은 인원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나 교육은 보통 종교시설을 이용해서 진행한다. 군대에서는 군종장교라고 해서 성직자를 담당하는 이들도 모두 군인이다. 이때 전화를 받은 목사님은 대위였다. 사단장님 이름까지 팔았는데도 목사님 반응이 영 미적지근했다. 청소까지 꼼꼼히 하겠다고 수차례 다짐하고 나서야 장소를 섭외할 수 있었다. 다 나랏돈으로 지은 건데 뭐 이리 빌리기 힘드냐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제 본격적인 싸움만 남았다. 바로 인원 섭외. 먼저 작전과에 연락해서 예하 부대별 일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훈련이 없는 부대 두 곳에 전화했다. 다음 주 월요일은 A연대가 수요일은 B연대가 각각 인원 100명씩 선발해서 오후 2시간 동안 정신교육 참여하라고. A연대 작전과장은 군말 없이 알았다고 답했다. B연대가 문제였다. 전화기 밖으로 욕설 비슷한 항의가 날아온다. 네 맘대로 부대 일정 짜느냐, 우리는 할 일 없는 부대 같냐, 다른 부대는 다 두고 왜 우리 부대만 하느냐, 이런 식으로 군생활할 거냐 등등 갖은 비난이 일었다. 나라고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닌데…. 욕을 듣다 보니 오기가 생겼다. 어차피 나는 군생활 오래 할게 아니니 할 말은 해야겠다.
“참여하지 못하시면 사유랑 해서 공문 보내 주십시오. 내일 오전에 정신교육 계획 보고하는데 말씀해주신 불참 내용 다 반영해서 A 연대는 교육에서 제외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작전과장은 소령이니 중위인 내가 욕을 할 수도 짜증을 낼 수도 없다. 계급이 깡패 아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계급에 눌려 당할 수많은 없다. '못하는 사유 내와라. 그대로 사단장한테 일러바칠 테다.'가 내 협박의 도구였다.
이 이야기를 듣더니 전화 너머 작전과장의 목소리가 갑자기 변했다. 전시도 아니고 훈련 중인 상황도 아닌데 사단장 지시에 반기를 드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못한다고 하면 사단장은 연대장에게 왜 못 오느냐 물을 텐데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어차피 하게 될 일인데 욕먹고 하느냐 그냥 하느냐 차이인 것이다. 이렇게 인원 섭외도 마쳤다.
정신교육 강연이 있기 전날 경리부(지금은 재경부)에서 탈영병에게 월급통장과 체크카드를 전달했다. 통장과 카드를 만지는 김 일병의 눈빛이 많이 흔들렸다. 모든 병사들에게 제공하는 통장하고 카드라 별다른 의미를 두진 았았다. 하지만 김 일병에게는 인생에서 처음 만져보는 자기 이름의 통장과 카드였다고 한다. 우리에겐 일상적인 일이 김 일병에게는 평소 너무도 누리고 싶었던 특별함이었다.
정신교육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김 일병의 이야기는 따로 교육영상으로도 제작되었다. 그리고 헌병대에서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는 희소식을 가져왔다. 며칠 지나지 않아 부대로 김 일병의 어머니와 누나들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연신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목놓아 우셨다. 아들의 뺨도 큰 눈물자국이 생겨났다. 누나들은 어떻게 살았느냐며 왜 집에 오지 않았느냐며 그간의 아픔을 토로했다. 가족의 재회였다. 이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일병은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현역복무부적합 처분이 내려져 다른 처벌 없이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가끔은 궁금하다.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우연히라도 만나면 이번에는 존댓말로 묻고 싶다. "아저씨, 잘 지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