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연군 Feb 11. 2019

[ROTC 장교 한 번 해볼래?]
가방 안에 뭐 들었니

그 열여섯 번째 이야기. 후보생의 가방 속

가방 안에 총 있지?


학군 후보생이 들고 다니는 007 가방, 우리들 말로 박스(box)라고 불리는 가방은 시선을 끈다. 안에 엄청 중요한 자료가 있을 것만 같은 모양새에 비밀번호까지 설정되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외부 사람은 007 가방, 후보생들은 박스라 부른다.


박스는 지급품이다. 

박스는 1인당 1개 지급되는 보급품이자 지급품이다. 단복을 입는 날은 반드시 지참해야 하는 필수품이다. 초기 비밀번호는 '000'. 지급받은 이후 개인별로 비밀번호를 따로 설정한다. 학군단에 군사학 수업이 있을 때는 모두가 같은 복장에 같은 박스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장관이다. 더욱이 일 년 차의 경우는 오와 열을 맞춰 걷도록 선배들이 지시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이들이기도 하다. 


후보생이 한 곳으로 모이면 박스도 한 곳에 가지런히 정리한다. 군대이니 오와 열을 맞추는 것은 당연하다. 같은 모양의 가방을 주욱 나란히 세워놓아도 모두 자신의 가방을 잘 찾아간다. 이유는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칸 주변에 자기 이니셜 스티커를 붙여놓는다. 아니면 가방 앞면에 국방부 마크라던지, 선배들에게 받은 계급장을 붙여서 구분한다. 



박스를 들고 다니는 데는 규칙이 있다. 

처음 박스를 지급받으면 보관방법, 파지 방법 그리고 휴대 방법을 모두 교육받는다. 방법은 ROTC 중앙회에서 지침을 내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100개의 학군단 각각 다른 규율을 유지한다. 하지만 그 대원칙은 크게 다르지 않다.


1. 박스는 항상 왼손으로 든다.

군인의 오른손은 언제나 경례를 준비해야 한다. 선배를 보거나 상급자를 만나면 언제든 재빠르게 경례를 해야 한다. 그래서 박스는 항상 왼손으로 들고 다니도록 한다.  


2. 검지는 살짝 내어서 박스를 받친다.

박스 손잡이는 왼손으로 주먹 쥐듯 말아 쥔다. 중요한 건 검지 손가락은 박스 쪽으로 빼내어 박스를 들고 다닐 때 흔들리지 않도록 받쳐준다. 박스의 무게 중심이 아래로 향하기 때문에 이렇게 잡아주지 않으면 걸음걸이에 따라 좌우로 춤을 추는 박스의 모습이 후보생의 '자세'를 떨어뜨린다.


3. 지하철에 탑승해서 박스를 내려놓을 일이 있으면 다시 사이에 둔다. 

지하철이나 버스에 승차하면 부득이하게 박스를 잠시 내려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무거운 박스를 하루 종일 들고 있는 것도 고역이다. 단복을 입고 좌석에 앉으면 등에 보기 싫은 주름이 가기 때문에 가급적 앉지 않도록 교육한다. 하지만 절대 규칙은 아니라서 선배들의 눈을 피해 자리에 앉거나 이를 통제하지 않는 학군단도 더러 존재한다. (원거리 통학버스를 이용하는 경우 반드시 착석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서서 가든 앉아서 가든 박스를 어디에 둘지 고민하게 되는데, 다리 좌우에 두게 되면 차량이 정차할 때 박스가 넘어지며 쿵하는 소리와 함께 플라스틱 소재 겉면이 깨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실제로 후보생이 잘못 놔둔 박스가 급정거에 넘어지면서 버스 제일 앞쪽까지 미끄러진 후에 탑승구 계단으로 쿵쿵 떨어지며 부서진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탈 때 박스의 위치는 자신의 다리 사이에 두도록 하고 있다. 


4. 언제나 비밀번호는 잠금 상태를 유지한다.

박스는 군사보안을 위해 언제나 잠금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뭐 군사보안이라고 할 것까지 없지만 상시 잠금으로 유지하도록 지시받는다. 하지만 계속 비밀번호를 설정하고 푸는 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래서 후보생들의 대다수는 비밀번호 끝자리만 살짝 바꿔 놓는다. 비밀번호가 '777'이면 '778'로만 다이얼을 돌려놓는다. 마지막 한자지만 바꿔서 쉽게 열기 위해서. 


가끔씩 선배들이 후배들의 박스 잠금 상태를 점검하는데 잠금 설정이 안 되어 있는 박스는 하늘로 날려 보낸다. 군사보안에 실패했다는 이유를 들면서. 지금에 생각해 보면 정말 군인 놀이에 지나지 않지만 당시에는 엄청 중요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어린 맹수들이 장난을 치며 사냥법을 배우듯이 이런 사소한 일들이 몸에 버릇으로 남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물론 다 좋은 쪽으로 해석할 때 이야기지만.


문제는 선배들도 이러한 생활을 그대로 했기 때문에 후배들의 박스 마지막 번호를 돌려서 박스를 열기도 한다. 이렇게 걸린 이들의 박스도 하늘로 날아간다. 


총은 들어있지 않다. 

가끔씩 학과 동기들이나 친척동생들이 거기에 뭐가 들었냐고 물으면 나는 늘 "총이 들어있다."라고 대답했다. 자꾸 열어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가장 좋은 대답이었다. 총이 들어 군사보안상 열어줄 수 없다고. 물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지만 군대를 가지 않은 이들 그리고 장교 경험을 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의외로 잘 먹히는(?) 농담이다. 


박스 안에는 온갖 잡다한 것들이 들어있다. 선배들이 용모복장 점검을 위해 몇 가지 물품을 지정해서 넣도록 한다. 거울, 빗, 헤어제품, 구두 광택제 등과 같은 것들을 기본으로 해서 A4용지 약간, 볼펜, 사인펜 등 학업에 필요한 용품도 함께 들어있다. 


이것들은 제외한 나머지는 순수하게 후보생들의 필요에 의해 담긴다. 나 같은 경우는 거의 교과서가 들어있었다. 헌법책과 행정법책 두 가지만 넣어도 박스는 늘 꽉 차서 틈이 없었다. 각각 1000페이지가 넘으니 무게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왼손으로만 들고 다녀야 해서 종종 허리가 아팠던 기억이 난다. 


배가 고파서 매점에 들어가면 먹고 싶은 빵과 과자, 음료수를 얼른 사서 박스에 담는다. 책가방이자 도시락 가방이다. 가끔 선배들 눈을 피해 휴식을 취하고 싶으면 박스를 책상 위에 세워놓고 옷걸이 삼아 자켓을 걸어 놓는다. 그리고 잠시 등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박스 안에 내용물이 다양한 만큼 그 사용처도 각양각색이다. 



이전 04화 리더는 타고날까? 만들어질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