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열여덟 번째 이야기. 병과
군에도 대학만큼 다양한 학과가 존재한다.
군대가 존재하는 이유는 전쟁을 위해서다. 전쟁은 가장 잔인하지만 가장 효율성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전시에 파괴된 전차나 대포 같은 것은 동일한 것으로 다시 지급해 줘야 원래의 전투력을 뿜어낼 수 있다. 그럼 그 사람이 죽었을 때는? 앞서 전사한 이의 능력과 동일한 사람을 채워줘야 그 부대의 전투력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아니 작전을 짜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각 부대마다 기대된 전투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 전투력 안에는 총과 대포 같은 장비는 물론 이를 운영하는 군인들의 능력까지 포함한 것을 의미한다. 그럼 대포나 전차처럼 군인이 전사했을 때 동일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대체하려면 평소 이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전차 운전병이 전사했다고 아무나 붙잡고 운전을 시킬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군대는 그 큰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많은 분과를 조성하고 그 분과별로 일정한 임무를 구분하여 병사들에게 주특기라는 것을 부여해서 일종의 Code 기호로 구분한다. 이를테면 AAAA를 운전병 코드라고 하면 운전병이 부족할 때 AAAA코드를 가진 병사를 해당 부대로 보내는 식이다. 사람의 능력에 따라 코드로 분류해서 부족할 때 이를 제공하는 형식은 보통 물류창고에서나 이뤄질 법하지만 전시에는 이런 방식의 효율성이 이미 검증되었기 때문에 거의 전 세계 모든 군대에서 적용된 보편화된 체계이다. (인권 문제가 제기될 수 있지만 사람이 죽어나가는 마당에 인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일단 살아야 인권도 찾을 것이 아닌가.)
이러한 체계는 장교라도 해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운전 장교, 취사 장교 같은 말은 들어보지 못한 것처럼 일반 병사의 주특기처럼 하나하나 세세히 구분하지는 않는다. 다만 군을 이루고 있는 큰 줄기를 나눠서 각각에 해당하는 자신의 병과를 부여받게 된다. 병과가 조금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각 대학교의 전공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전공도 학부 정도로 보는 게 좀 더 정확한 비유일 것 같다. 예를 들면 사범대학을 병과로 본다면 국어교육과를 주특기로 볼 수 있다. 보병이라는 큰 병과의 틀 안에는 소총수, K3 기관총, 81mm 박격포, 90mm 무반동총, 기계화보병 특기가 포함되어 있다. 즉 보병장교가 되면 이러한 군사특기를 갖춘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도록 이론교육을 물론 실전과 같은 훈련을 거치도록 되어있다. 한번 병과를 선택하면 그 병과 내에서 계속된 임무를 수행하게 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병과를 바꾸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다. 국문학을 전공하던 친구가 자기 마음대로 수학과로 전과할 수 없는 것처럼 군대에서도 군대 전체가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체계를 엄격히 적용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 병과를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장군이 되는 것이다.
장교를 비롯한 모든 군 간부들은 명찰 위에 본인의 병과 마크를 부착하도록 되어있다. 이 마크만 보고도 이 사람의 병과가 어느 것이구나 하고 단번에 인지할 수 있다. 하지만 장군이 되면 이런 병과를 초월하여 군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이 검증돼서 병과에 구애받지 않게 되고 더 이상 군복에 병과 마크를 부착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경리를 담당하던 장교가 장군이 되었다고 보병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가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운신의 폭은 늘어날 수는 있지만 본인의 출신을 완전히 배제하고 임의로 담당 부대나 임무가 정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병과 선택이 군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ROTC는 마지막 군사훈련과 임관고사를 마치고 나면 본인이 희망하는 병과를 지원하게 된다. 1에서 3지망까지 원하는 병과를 쓰게 되는데 병과 지원 자격은 관련 병과 전공자 이거나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자격증을 갖추어야 한다. 가령 공병장교를 원하는 이는 토목이나 건축공학처럼 관련된 전공자이거나 건축기사 토목기사와 같이 이에 상응하는 자격증을 갖춘 경우 지원할 수 있다. 물론 아무련 연관 없는 국문학과도 공병에 지원할 수는 있다. 다만 99.9%의 확률로 떨어지고 자연스럽게 보병으로 정해지게 된다. (보병은 전공 무관으로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지원하지 않더라도 다른 병과 선택에 실패하면 자연히 보병이 된다.)
전공이나 자격증이 있다고 원하는 병과를 무조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병과 선택을 갈음하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임관 성적이다. 임관성적은 임관고사 시험성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입소해서 군인화 교육을 받았던 기초 군사훈련과 각 학군단에서 학기 중에 받은 평가, 그리고 마지막 입영훈련인 4학년 하계훈련까지의 성적을 종합하여 서열을 매긴다. 오타가 아니다. 분명 서열로 성적이 발표된다. 그리고 이 서열순으로 군번이 부여된다. ROTC 서열 1번과 마지막 끝번 사이에는 4,000등이 차이가 날 정도이다. 적어도 이 서열상 20% 안에 들지 못하는 경우 본인 원하는 병과를 선택하여 배정받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나 많은 단기 복무자들이 바라마지 정훈, 재정, 인사행정, 헌병과 같은 행정병과는 상위 10% 내에 들지 않으면 거의 떨어진다고 봐야 한다. (한번 지원했다가 떨어지면 보병으로 분류될 확률이 매우 높으니 병과 선택에 신중함이 필요하다.) 실상 이런 행정병과의 전체 수급 인원이 한해 200명이 채 안 되는 것을 고려하면 서열 상위 10% 이내가 아닌 경우엔 합격을 장담하기 어렵다. 눈치싸움이 치열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