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스물세 번째 이야기. 임관식.
소위 임관을 신고합니다!
해마다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장교들의 임관식이 줄지어 있다. 학군장교 임관식이 그 시작을 알린다. 이어서 3사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가 임관식을 거행한다. 임관식은 장교들에게 생에 단 한번 있는 매우 뜻깊은 행사다. 몇 년 동안 이날만을 바라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감회도 새롭다.
대통령이냐, 국무총리냐
임석상관의 급이 임관장교 군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행사의 규모와 기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똑같은 임관 사령장을 받더라도 대통령에게 받는 게 가족들 앞에서 조금 더 모양이 날 뿐이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대통령이 모든 임관식에 참석할 수 없기 때문에 순번을 매겨 돌아가면서 참석해왔다. ROTC, 육, 해, 공군 사관학교 그리고 3군 사관학교를 해마다 돌아가면서 참석하는 것이다. 학사장교 같은 경우는 임관 시기가 아예 달라서 대통령이 참석하여 주관한 역사는 없었다. 국정수행이 늘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서 참석이 예정되어 있더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국무총리나 국방부장관 또는 참모총장이 대참 하여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했을 당시엔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권한대행 명의로 임관 사령장이 나간 사례도 있다.
합동임관식이 생기기 이전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학군장교와 육군 사관학교 임관식을, 2009년 해군 사관학교, 2010년 공군 사관학교와 3 사관학교 행사를 각각 방문했다. 장교 임관식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가장 처음 하는 공식행사다. 박근혜 정부 탄핵 이후 대통령 선거가 12월에서 3월로 바뀌면서 임관식이 갖는 정치적인 중요성(?)도 역사로 사라지겠지만 새해 주요 행사 중 하나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임관식에 가장 큰 변화를 준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군의 기존 격식과 형식을 타파하는 결정을 내린 두 사건이 있다.
합동임관식
2012년을 시작으로 2017년까지 육해공군 모든 장교를 한날한시에 충남 계룡대에 모여 임관식을 치르도록 했다. 그래서 이름도 장교 합동임관식이다. 물론 여기서도 학사장교는 배제되었다. 3월이면 학사장교는 이제 막 교육 입과 해서 훈련을 시작할 시기라 이 시기에 함께 임관식을 거행하면 운전면허를 먼저 발급해 주고 운전면허 시험을 보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래서 학사장교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전 초급장교 임관식을 함께 실시하게 됐다.
합동임관식을 거행하니 순번제로 대통령이 어디를 참석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사라졌다. 각군의 초급장교가 임관을 함께하면서 군이 60년 넘게 안고 있는 합동성에 대한 개선도 이뤄지기를 내심 바랬다. 하지만 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임관식 당일날 초급장교 오천명에 가족을 합한 수만 명의 인파가 계룡대로 향했다. 각 사관학교는 졸업식과 별개로 임관식을 거행해야 해서 2중고를 앓았다. 목표했던 군 합동성은 단순히 하루 임관을 같이 한다고 높아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측정할 방법도 요원했다. VVIP(대통령)의 편의성 말고는 크게 얻을 것이 없는 행사가 되었고 2017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의자 2만 5천 개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첫 공식행사는 ROTC 임관식이었다. 임관 장교들은 행사 일주일 전부터 모여서 합숙하며 식을 준비한다. 모든 준비를 마친 행사 3일 전. 청와대로부터 VVIP의 지시가 내려왔다. 참석한 학부모들과 임관 장교들이 힘들 수 있으니 의자를 준비토록 한 것이다. 군을 경험해보지 않은 이 대통령의 전에 없던 배려로 인해 행사 주관하는 관계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군 창설이래 군인들의 행사를 앉아서 진행한 역사가 없었다.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 파격적인 행사 조건이었다.
지시가 있던 당일 저녁 트럭이 줄지어 행사장으로 드나들며 의자 2만 5천 개를 배달했다. 하루 만에 이 많은 의자를 구한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의자 세팅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5천 명의 예비 장교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세시간도 안돼서 모든 정리를 마쳤다.
문제는 행사 식순. 상관에게 임관식에서 앉아서 경례를 할 순 없었다. 그리고 경례를 위해 이들을 세운 뒤 행사 마지막까지 세워놓으면 VVIP 지시로 의자를 가져다 놓은 이유가 없어진다. 그래서 머리를 짜낸 끝에 새로운 지휘 구호를 추가했다.
"임관 장교 일어섯!" "임관장교 자리에 앉아!"
너무나도 이색적인 임관식은 며칠 뒤 진행되는 육군사관학교 임관행사에도 큰 난제를 던졌다. VVIP의 입장이 임관 장교를 배려한다는데 육사라고 배짱을 튕길 순 없었다. 하지만 육사 임관식에는 생도들의 분열과 같은 자체 행진 행사가 전통으로 남아 있어 의자를 두고서 앉자니 전통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두 명의 대통령과 유수의 정치인 등 사회적 영향력을 강력히 행사하는 육사 선배들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을 무시할 수도 없는 처사였다.
결국 육사는 대통령을 설득해 기존과 같은 방법으로 임관식은 진행했다. 이후 군의 행사에 대해 대통령이 어느 정도 이해를 가졌는지 46기 학군장교 임관식 이후 앉아서 행사를 진행토록 지시하지 않았고 이날의 행사는 군의 역사에 유일무이하게 임관장교가 내외빈과 동일하게 앉아서 진행했던 사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