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서른다섯 번째 이야기. 일 물어오는 제비.
군대는 거대한 행정조직이다.
군대는 거대한 행정조직이다. 실제 군인들은 '아니다'라고 소리치고 싶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국방부가 항상 전투형 강군, 싸워 이기는 군대를 강조한다는 것은 그 부분이 취약하다는 소리다. 바꿔 말하면 지금은 행정 군대이니 전투력이 강화를 위한 개혁이 필요합니다라는 말이다.
'행정조직이 뭐야?'라는 의문이 든다면 가까운 관공서를 방문하면 된다. 잘 짜인 조직도에 각자 업무를 나누어 일을 한다. 좋게 말하면 업무분장이고 나쁘게 말하면 내일만 하겠다는 거다.
일 물어오는 제비.
최고의 상사는 일을 쳐내는 사람이다. 이건 군이건 사회건 다르지 않는다. 그런데 실상 일을 쳐내는 상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왜 그런 상사는 항상 남의 부서에 있는지 한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일을 처내지 못하고 일을 가져오는 상사를 부대 실무자끼리는 '제비'라고 불렀다. 정확한 별명은 '일 물어오는 제비'다. 흥부를 위해 박씨를 물어오는 제비처럼 회의를 가기만 하면 어김없이 일감을 물어온다. 환장할 노릇이다.
여기서 일을 물어온다는 게 어떤 여파가 있는지 조금 설명하면 일단 계획된 일이 아니라는 거다. 처음 연간 계획에 포함된 일이면 하나의 사업으로 예산도 배정되어 있고 시기도 정해져 있다. 그러니 사전에 충분히 준비할 수 있고 또 이런 일은 대부분 정기성 업무로 그 이전에도 계속 해왔던 일이다. 작년에 했던 것을 참고하면 매우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
그럼 상사가 물어오는 일은 무엇이냐 하면 대부분 비정기성 업무다. 일전에 한적도 없어서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또 이 업무를 추진하는데 배정된 예산도 없다. 예산 사용 계획까지 따로 승인받아야 한다. 안 그래도 일이 많아 바쁜데 이런 예기치 않은 일거리가 한두 개 떨어지면 주말에도 출근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그리니 자연히 상사가 일을 물어오면 실무자로서는 고깝게 볼 수밖에...
일 물어오는 유형
일을 쳐내는 사람과 일을 물어오는 사람을 보면 명확히 구분된다. 먼저 일을 처내는 사람은 보통 "짬"과 "계급"이 받쳐준다. 누가 해야 할지 애매한 문제에 대해 "그거는 예전에 그 부서가 했던 기억이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가정하면 이해가 쉽다. 짬과 계급이 받쳐주면 '군 생활을 오래 하셨으니 이런 류의 일도 경험했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설령 아니다라고 생각해도 쉽사리 반대하지 못한다. 계급이 깡패니까.
하지만 계급도 짬도 안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디 부대가 그렇게 하느냐, 남의 부대가 한다고 우리 부대도 그렇게 해야 하느냐, 일하기 싫어서 그러느냐 등등 수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욕먹고 하냐 그냥 하냐 정도 차이밖에 안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일 물어 오는 상사가 측은하게 느껴지지 않는 점은 그 일을 실무자가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광판
사단장의 헌 동창회에서 전광판을 부대에 선물로 기증했다. 위병소를 거쳐 본청으로 들어오는 길에 LED 전광판이 설치됐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전광판 운영을 누가 하느냐였다. 전광판이 설치된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부서는 정보처였다. 그리고 전광판에 담을 부대 주요 일정을 종합하는 작전처였다. 그리고 부대원들을 대상으로 캠페인을 하거나 안내문을 작성하는 것은 인사처 소관이었다. 이 전광판을 부대 비품으로 여긴다면 군수처에서 담당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결국 이 업무는 정훈부로 넘어왔다.
'장병 정신교육에 활용할 수 있다'가 그 결정 이유였다. 명분이야 아무 소용없었다. 당시 우리 참모가 가장 계급과 짬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일을 안 하면 바로 티가 나지만 일해도 성과가 안나는 귀찮은 일이었다. 이런 일이 많아질수록 업무부담은 늘어나 야근이 잦아지고 정작 본연의 업무에 전력을 다하지 못한다. 군에 남기로 목표한 이들은 근무평정에 커다란 악재가 아닐 수 없다.
피할 수 있다면 끝까지 피해라
본연의 목적, 전투를 위한 업무가 아니라면 끝까지 피하는 게 옳다. 군에선 단순 행정처리를 위한 행정이 만연하다. 예를 들면 서류를 생산하면 File 철을 만들어야 하고 File 철을 만들었으면 보관 대장을 만들어야 하고, 이런 보관 대장 현황판을 만들고 하는 불필요한 행정업무가 계속된다. 전자문서를 추구하지만 근거자료를 위해 출력해 보관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군에서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사회에서도 훌륭한 무기로 써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