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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연군 Oct 24. 2020

항공 안전 2등급의 대한민국

항공 역사를 바꾼 열두 가지 사건 사고. 여섯 번째 이야기

2001년 8월 17일은 항공인들에게는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庚戌國恥)에 비견한 항공국치(航空國恥)일로 여긴다. 이 날이 치욕적인 이유는 미국이 우리나라의 항공안전도를 기존 1급에서 2급으로 하향 조정한 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치욕의 날을 그냥 갑자기 다가오진 않았다. 몇 년만 앞으로 시계를 돌려서 굵직굵직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1997년 대한항공 801편 괌 사고로 228명이 사망했고, 1998년 대한항공 8702편이 활주로를 이탈한 사고로 탑승객은 무사했지만  해당 항공기인 B747은 수리 불가로 폐기 처분되었고, 같은 해 아시아나 221편은 미국 앵커리지 공항에서 지상 규정속도를 위반하여 다른 항공기와 지상 충돌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1999년엔 대한항공 6316편 화물기가 상해 공항 인근에 추락해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가 하면, 같은 해 대한항공 8509편 화물기가 런던을 이륙하자마자 인근 숲으로 추락했다. 

아시아나항공의 앵커리지 공항 지상 충돌 사고 <출처: 나무위키>

사고 원인을 뒤로하고서라도 우리나라 항공기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의 구조적인 문제점이 없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국토교통부의 오만

우리나라와 미국은 98년 4월에 항공협정을 체결했다. 여기에는 상대방 국가의 안전도를 서로 체크해서 국제기구(ICAO)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취항을 제한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이 달렸다. 항공업무를 담당하고 있지만 전문성이 부족했던 국토교통부(당시 건설교통부)는 그저 의례적인 문구로만 생각하고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 


이후 ICAO와 미국 항공청(FAA)에서 지금의 안전실태가 부족하니 국제기준에 맞춰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라는 권고를 수 차례 했음에도 수수방관하며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나라 항공산업은 지금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라 국제평가에 대한 국토부 내부의 전문가 양성이 안되어 있기도 했고, 국토부 자체에서도 어느 정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 못 들은 척할 수 있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이해 못한 국토부 <출처: MBC>


 세 가지 믿는 구석

항공분야에서 국제적인 평가 기준을 들여다보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규정/제도화 여부다. 즉, 항공안전에 대한 국제적인 기준이 국가 법령이나 기준에 반영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항공사에서 안전한 운항을 위해 국제기준을 지킨다고 해도 법령에 이런 내용이 없으면 그 기준을 안 지키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법에는 국제기준에서 요구한 내용이 하나도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토부는 세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첫 번째 믿음은 일본이다. 조금은 창피한 말일 수도 있는데, 우리나라의 법의 상당 부분은 일제시대 법을 모태로 하고 있다. 민법 같은 경우는 법을 조금만 배우고 일본어를 약간만 알면 일본 법전을 술술 읽을 수 있을 정도다. 대부분의 내용이 같기 때문이다. 항공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본의 항공법과 우리나라의 항공법은 거의 같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에는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지적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두 번째 믿음은 주권국에 대한 국제법 원칙이다. 주권국가 사이는 상하관계가 아닌 평등한 관계로 A 국가가 B국가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내정간섭이 된다. 물론 실제 국제사회에서는 힘으로 눌러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설마 미국이 피로 맺은 혈맹국가인 우리나라에게 이 법을 만들라 저 규정을 내와라 하는 내정간섭에 가까운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마지막은 그냥 아무 일이 없을 거란 허황된 믿음이다. 지금까지 어느 국가도 우리나라에게 국제기준을 가지고 시비를 건 적도 없었고, 이게 문제 된 일로 없었다. 98년과 99년 그리고 2000년까지 미국과 국제기구에서 여러 차례 했던 권고를 따르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자연히 생겨버렸다. 


KBS 메인 뉴스로 보도되었다. <출처: KBS>
항공안전 2등급 국가의 오명과 탈피

미국 전문가 집단이 한국을 방문해 실사를 시작했다. 점검이 끝날 때까지 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가입한 선진국인 한국의 항공 분야 실태가 저기 아프리카 나라와 다를 바가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국토부에는 공무원만 가득했지 조종사 출신도 한 명 없었을 정도였으니 미국 점검관이 놀랄 수밖에..


그들은 귀국하고 나서 우리나라를 항공안전 2등급 국가로 분류했다. 곧 우리나라 정부는 뒤집어졌다. 항공안전 2등급 국가가 되면 우리나라 항공사가 미국에 취항하지 못한다. 이는 미국으로의 물류도, 인적교류도 끊겨버린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이 일의 책임을 물어 장관을 경질시켰고 미국 항공청의 전문가를 모셔와 컨설팅을 받았다. 급하게 법령을 정비하고 국토부에 조종사 출신도 들여 겨우 구색을 맞출 수 있었다. 그 결과 다행히도 3개월 하고도 20일 만에 항공안전 1등급 국가로 재분류될 수 있었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우리나라 항공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과거의 주먹구구 방식이 아닌 전문가에 의한 통제가 가능해졌고, 국제기준이 곧 국내 기준으로 적용되었다. 하지만 항공국치일과 그 배경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날의 교훈을 잊는다면 언제든 반복될 수 있는 일이기에, 항공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되새겨 봄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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