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 저 | 인플루엔셜
지난 주말, 바둑의 고수라는 말로는 부족하여 '국수(國手)'라고 불리는 조훈현 님의 에세이 ≪고수의 생각법≫을 읽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에게는 분명 남다른 내공이 있었다. 바둑판 위에서 쌓아온 수십 년의 경험이 삶을 바라보는 그만의 철학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서두에서 저자는 겸손하게 이렇게 말한다. 본인은 학교도 듬성듬성 다녔고 조직 생활한 적도 없어서 일반인들이 겪는 인생의 경험들을 다 알지는 못하는데, 그런 자신이 삶에 대하여 말하려니 걱정이 앞선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판에서 배운 '생각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언급하며 어느 인생이나 근본은 같고, 생각하는 방법이야말로 삶을 헤쳐나가는 핵심이라는 믿음을 전하고자 한다고 했다.
(4~5p)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인생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바둑밖에 몰랐지만 그 안에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경험했고 희망과 절망, 성공과 실패, 음모와 배신까지도 경험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바둑판만 끌어안고 사는, 따분하고 고요한 인생이었을지 몰라도 내 머릿속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요동치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저자의 말처럼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순간이 천국이 될지 지옥이 될지는 나의 생각에 달려 있다.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이 있기에 그런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저자도 나도 그리고 우리 모두도, 매일같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의 바둑판 위에서 조심스럽게 한 수 한 수를 두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나의 생각이 때로는 나를 기쁘게 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은 저자가 바둑판에서 배운 생각의 법칙을 하나씩 풀어내며 일상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세상사를 바둑판이라고 생각한다면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고 단언하면서 말이다.
(26p) "어디에 있든 스스로 돌을 던지지 않는 한, 혹은 판을 모두 채우지 않는 한, 인생이라는 바둑은 끝나지 않는다. 현재 어떤 위기에 있더라도 아직 살아날 희망이 있다. 바둑이 내게 가르쳐준 바에 따르면, 세상에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 집중하여 생각하면 반드시 답이 보인다. 심지어 내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조차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의외의 답이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때로는 인생의 묘수들을 알려주기도 한다.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 매일의 이기고 지는 과정을 덤덤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 이길 수 있다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36p) "공식을 외워서 문제를 푸는 건 매우 쉽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조금이라도 공식에서 벗어난 문제가 나오면 힘을 쓰지 못한다. 반대로 혼자서 실컷 헤매본 사람은 공식 따위는 몰라도 된다. 생각을 하면서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내면 되기 때문이다."
(66p) "감정은 그저 흘러왔다 흘러가는 덧없는 것으로 어떤 감정도 스스로를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생님의 삶의 자세였다. 기쁨도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고, 슬픔과 분노도 아무 감정 없이 바라봐야 한다. 이겼다고 우쭐해하면 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기기 위해서는 수천 번의 지는 경험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79p) "승부의 세계가 원래 그렇다. 아니, 승부를 떠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원래 그렇다.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길 수 있다면 이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반전의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내가 버텼던 이유는 이겨야 한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아직 이길 기회가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아직 바둑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제자인 이창호 9단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이후 느꼈던 감정을 소상히 밝힌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내용들이 최근 '승부'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니 시간 날 때 꼭 한번 찾아서 챙겨 봐야겠다. 사제 간의 긴장되는 승부 장면이 영화로는 어떻게 꾸며져 있을지 몹시 기대가 된다.
(71~72p) "지키려고 할 때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막상 다 잃어버리니 자유로웠다. 그래. 밑바닥까지 떨어졌으니 이제 더 나빠질 게 없어. 지금부터는 올라갈 일만 남은 거야. 한 발짝만 앞으로 움직여도 일보전진이 되는 거니까. (중략) 이기고 지기를 그토록 반복했지만 승패에 정말로 초연해지기 시작한 건 바로 이때부터다. 수많은 판을 싸우면서 나는 내가 언제든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