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긁힌다는 것

진실의 모서리는 몹시도 날카롭다.

by Ryan Choi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나 일상 대화에서 '긁힌다'는 말이 쓰이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언제 어디서부터 이 말이 유행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떤 말들로 상대방을 조롱하거나 놀릴 때 그 사람이 그것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너 긁혔구나?"라며 더 놀리게 되는 그런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곤 하는 것이다.


사실 '긁힌다'는 표현이 이렇게 일상의 언어로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피부가 거친 표면에 스쳐 지나가며 상처를 입듯이, 우리의 마음도 사실 특정한 말들에만 반응한다. 아무 말이나 우리를 긁지 못한다는 점이다. 신기한 것은 상대방이 나를 비난할 때 내가 은연중에 그것을 인정할 때만 유독 상처를 입게 된다.


우리 내면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는 균열, 그 미세한 틈새를 정확히 콕 찌르는 말들만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전혀 사실과도 다르고 내가 아픈 지점과 거리가 먼 말은 큰 타격이 없다. 상처가 되지는 않는다. 남의 비난이 유독 상처가 되는 순간은 그 말속에 담긴 진실의 조각이 우리의 자각과 만나는 때이다.




보고서를 제출한 후 부장이 "내용은 좋은데 문장이 너무 길어서 읽기 힘들어. 좀 더 간결하게 써봐."라고 피드백했다고 가정해 보자. 실제로 한 문장에 여러 내용을 다 담으려다 보니 문장이 길어지고 복잡해졌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다면, 도움이 되는 조언인 줄 알면서도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힐 것이다.


'아, 들켰네'라는 마음과 함께 괜히 변명하고 싶어 지거나 화가 날 수도 있다. 아니면 '내 스타일이 원래 그런데'라며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평소 간결하고 명확한 문서를 잘 쓰는 사람이라면 '이번에는 내용이 많아서 그랬나?'라며 큰 타격 없이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같은 말인데 내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남의 말이 내게로 와 상처를 주려면 내 마음 어딘가에서 '맞는 말이야'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이 나를 찌를 때, 사실은 그 말보다도 내 안에 있던 불편한 진실이 더 큰 상처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진짜 아픈 말은 우리가 스스로도 어렴풋이 인정하고 있던 부분, 아직 직면하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숨겨두었던 취약점을 정확히 찌르는 말들이다. 반면에 전혀 사실과 다른 비난은 그저 소음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비난은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만들고, 어떤 비난은 그저 바람처럼 지나간다.




진실은 참으로 날카로운 모서리다. 그리고 긁히는 경험은 분명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아픔 자체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상처는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과 마주할 기회를 준다. 누군가 우리의 약점을 지적할 때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그 순간의 아픔은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인정하기 어렵고 자존심이 상할 수 있지만, 결국 그 지적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진실한 비판은 마치 거울처럼, 보기 싫은 모습일지라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 준다. 반대로 전혀 근거 없는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본성을 드러내며 우리에게 거리를 둘 이유를 제공한다.


결국 '긁힌다'는 경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정당한 비판은 아픔을 감수하고 성찰의 기회로 삼으면 된다. 반면 부당한 공격이라면 그 사람과 적당히 거리를 둬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에 내면의 성숙함이 드러난다. 모든 비판을 맹목적으로 수용할 필요도 없고 무조건 거부할 필요도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난의 진정성과 내가 알고 있는 내면의 진실 사이의 일치 여부다. 그것이 일치하여 나를 긁었다면, 그때의 그 고통은 단순한 상처를 넘어 성숙한 삶의 지혜로 거듭날 여지가 있다. 너무도 아픈 그 말,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 말이 때론 나를 좀 더 잘 알아가게 만드는 소중한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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