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다른 선택을 했는가?
2017년 여름, 부산에서 열린 광고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을 때, 나는 여러 나라에서 온 경력 많은 Creative director들을 만났다. 두바이, 태국, 독일, 스페인, 싱가포르, 몽골 등 내 예상보다 큰 행사 규모와 다채로운 참여자들의 에너지가 흥미로웠다. 3일간의 일정 중 밤마다 열리는 네크워킹 파티에서 이들과 술 마시고 춤도 추다 보니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임에도 행사장에서 만나도 대화가 편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바람 쐬러 나온 자리에서 던진 나의 질문에 15년 이상 일해온 그들의 대답은 '뭐 너도 알잖아... 매일 밤새고, 매일 수정하고, 클라이언트 설득하고... 이게 반복되고...." 다들 내 예상보다 더, 매우 비슷한 경험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부터 나는 왠지 점점 더, 그곳에서 '혼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아주 개인적인, 부족한 내 경험 안에서의 생각일 뿐이라고 묻어두려 했었다. 그냥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기업에 제안할 광고 아이디어를 짜느라 밤을 새워서 팀원들과 고생을 해도, 최종 선택되는 아이디어에 대한 기준점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모호했다. 동료들도 몰랐고, 기업의 담당자도 어떤 아이디어가 최선인지에 대한 기준점이 없었다.
여기 내가 직접 참여해 만든 영상 광고 중의 하나가 있다.
예전에 국내에서 유행했던 한 통신사 광고를 패러디한 결과물이었다.
원래 우리 팀의 아이디어는 두 가지로 (영드 '셜록'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콘셉트) 방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저 tv셋톱박스의 기능을 이용해 해결해나가는 방향으로 준비했었다. 하지만 발표 이후 고객사 측의 즉흥적인 아이디어로 변경 및 최종 제작 결정되었다.
택시를 타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서, 다들 아쉬움에 한 마디씩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그때 깨달았다. 실은 어느 쪽도 자신의 아이디어가 최선임을 확신하거나 설득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왜? 모두의 관심은 온통 빠른 집행과 당장의 결과물에 맞춰져 있었으니까.
기업 입장에서의 광고는 마케팅 활동 중에 활용되는 하나의 소재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마케팅은 '제품/서비스가 내포한, 고객에게 전달하는 '가치'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발굴하고, 알리는 모든 기업 활동'이다. 다시 말해, 효율이 좋은 광고를 만들기 위해, 또는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필요한 건 제품/서비스가 고객에게 전달하는 가치의 '명확성'에 있다.
예전 페이스북을 뒤흔들었던 마약 베개 광고 영상은 내국인 대상으로만 몇천만 뷰를 기록한 걸로 기억한다. 연예인이 나오지도 않고, 그저 기존 베개의 불편했던 점을 해결한, 목 뒤의 공간을 받쳐주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을 강조했을 뿐이었으나 사람들의 반응은 어마어마했었다.
또한 애플의 아이폰 옥외 광고는 shot on iphone 6라는 카피 하나에 사진 하나만으로 채워져 있었던 점을 기억해보자. 애플 본사에서는 카메라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가장 많은 인력과 비용을 투자하지만, 이들은 그런 내부의 노력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누구나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이런 멋진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음을 드러내는 데에만 집중한다.
택시 안에서의 깨달음 이후로 광고를 만들기 전, 제품이나 서비스가 지닌 고객에게 주려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확인하려 해 보았으나, 항상 아이디어 미팅의 시작점은 브랜드 가이드라인과 PPT에 쓰인 담당자가 정리한 원하는 결과들뿐이었다. (대부분 brand awareness 및 social engagement rate 상승으로 비슷) 그리고 쏟아져 나오는 레퍼런스 및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정적인 소개들로 인해 '가치'에 대한 내 질문은 쉽게 묻히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년간 더 현장에서 부딪히며 경험해본 뒤 내가 얻은 결론은
그저 나만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외면했을 뿐. 이후 이 분야에서 조용히 걸어 나오는 선택을 했다.
관련해 이 과정에서 내가 경험한, 가치의 '명확성'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드는 광고 관련 기존의 인식들은 다음과 같다.
제한된 미디어 매체로 광고 속 유명인들의 이미지를 소비하던 시대가 지나갔다. 인터넷, 모바일을 통해 양방향 소통을 넘어 상호 작용의 단계에까지 도달한 현재를 사는 이들을 대상으로는 기존의 '노출을 바탕으로 인식을 공략하는 광고'가 예전보다 광고 효율이 떨어졌음은 이제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대중을 대상으로 이 일방향적인 노출이 효과를 발휘하다는 믿음은 여전히 강력하다.
예전 한 광고 회사 임원분이 '재미있고, 웃긴 아이디어를 가져와라. 감동적인 코드는 맞지 않다.'라고 이야기하신 바 있다. 그러나 내게 있어 위와 같은 표현은 '콘텐츠' 형태의 결과물에 대해 평가할 때 적합하나 광고의 기획단계에서 기준점으로 논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쉽게 말해, 방송국과 영화계에서 제작하는 TV 프로그램, 영화는 완성이 되면, 그 자체로 돈을 벌어들이는 콘텐츠, 즉 '상품'이 된다. 이 상품은 대중에게 노출이 되면 될수록 수익을 창출하기에 그 제작 목적에 잘 부합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이와 같은 콘텐츠에는 위의 재밌거나, 웃기거나, 감동적인 코드에 대한, 대중이 좋아하고 돈을 내고 시청하게 하는, 제작 전 논의가 핵심이 되는 게 맞다.
하지만, 광고는 제품/서비스의 가치를 드러내고 알리는 게 핵심 목적이라는 점에서, 콘텐츠로서의 평가에 집중하기 이전에, 왜 이 제품을 사면 좋은가에 대한 논의에 중점을 둬야 한다. 가치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제작을 위한 아이디어를 구조화하고 설득하려 하는 건 적어도 나에게는 매우 어려운 경험이었다. 생각해보라. 우리의 상상력은 끝이 없지만, 멈추고 조율해야 하는 기준점이 없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주말 낮, 광고를 만드는 전문가들이 둘러앉아 회의를 장시간 진행한다. 누군가 발제를 하고, 토론을 통해 콘셉트가 제시되고 서로의 전문성을 활용해 최적의 big idea를 도출한다.
여기에서 딱 하나 내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느낀 부분은 아이디어가 광고라는 형태로 전달되는 상대, 즉 잠재 고객들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거나 왜곡된 정보를 바탕으로 위와 같은 전문가스러운 논의가 몇 시간씩 진행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정보는 그 미팅 현장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경험과 전해 들은 이야기가 전부이며, 고객은 정형화된, 구매하는 순간에만 머물러 있는 존재로 인식된다.
무엇보다 참가자들의 전문성과 위엄으로 인해 차마 제품이나 서비스가 품은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건 이해받기 어려운 행동이 되기 쉬웠다.
사실 광고에 대해 내가 하는 이야기들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비칠까 두려운 부분이 크다. 실제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워낙 다양한 목적과 의미를 바탕으로 제작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나는 그중에서도 '가치'에 집중하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에는 예전 시사교양 PD로서의 경험들이 그 중심에 존재한다.
당시에 나는 여러 상황들에 놓인 사람들을 취재하면서, 그들의 현실이 언론에서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키워드와 기사 내용들과는 크게 다른 점들을 흔하게 목격했다. 조직 폭력배 출신 주지 스님들 간의 음해와 폭력사건, 해남 땅끝마을 공무원의 기초생활수급자들의 생활비 착복을 통한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 구매, 인터폴 수배 아동 성범죄자인 국내 초등학교 원어민 교사의 5년 간의 행적 등등.
위의 예시들이 그저 자극적인 소재들로 보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우리가 일상에서 평범하게 경험하고 교류하는 대상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몇 가지 적어보았다.
이렇게 쉽게 정리되어 표현될 수 없는 각각의 모습들이 모여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연결되고 이를 언론이 단편적으로나마 쉬운 용어와 표현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기사를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고, 이는 다시 평가와 주장의 기반이 된다.
돌아보면 나는 광고를 제작할 때, 이런 파편적 정보를 토대로 고객의 세상을 인식했다. 여기에 다시 기발한 아이디어에 대한 집착으로 고객이 흥미를 느낄 거야 라고 생각되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몇 년간 충실히 결과물들을 만들었다. 그러다 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내가 서 있던 광고의 세상에서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던 지점을 확인할 수 있었고, 다른 결정을 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다시 한번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관심과 관찰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를 주요한 조사 대상으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고객사가 믿는 제품/서비스의 가치가 현실에서 어떻게 경험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잠재 고객들의 삶의 순간으로 들어가 그 속에 존재하는 '맥락'을 이해하며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데이터를 얻는 과정을 스스로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Reason of creativity라는 이상한 이름을 들고 나는 2017년 내내 외국계 및 국내 광고 회사의 대표 및 임원들을 무작정 찾아다녔었다. 대부분의 거절과 간혹 만나는 비웃음을 경험하면서 한편으로는 믿고 싶었던 듯하다. '해외는 좀 다를 거야. 외국의 광고회사는 이런 점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리고 이 날 광고제에서 만난 다른 creative director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 전의 혼자 시작해야겠다는 결정이 옳았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태국에서 온 한 친구는 그렇게 사람들의 일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면, '너는 정치인이 되면 크게 성공할 거야.'라는 놀림 같은 농담을 내게 던졌다.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나만의 걸음을 경험했다.
P.S. 마지막으로, 연간 수백억씩 마케팅 비용을 쓰던 예전 고객사의 브랜드 담당자를 인터뷰한 대략적인 내용을 공유해본다. 해당 브랜드는 당시 대형 종합 광고 대행사와 함께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TV 광고 및 디지털 콘텐츠 제작 및 집행)을 진행 중에 있었다.
"광고 자체는 뭐 괜찮아요. 다만 우리는 과금할 수 있는 대상, 20대에서 30대가 주요 고객인데, 이상하게 10대만 우리 광고에 열광해요... 광고 회사 대표가 페친인데, 좋은 광고주 덕분에 성공적인 캠페인을 진행했다고 올린 우리 브랜드 광고 영상 관련 포스팅을 보고 있자면... 화가 나요 솔직히. 돈은 우리가 썼는데, 매출에는 영향이 적고, 성취에 대한 축배는 본인들이 들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