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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Dec 22. 2019

혐오는 무조건 나쁜 걸까?

혐오에 담긴 다양한 의미에 대해

이번 주 독서 모임의 책은 한강이 쓴 "소년이 온다"였다. 광주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소시민을 다룬 소설이다. 이 책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그중 한 분의 질문이 모임을 블랙홀 같은 토론의 장으로 끌어당겼다. 질문은 소설 속 한 소년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별다른 동기 없이 그저 남들이 하니까 시위에 참여한 듯한 소년, 동호. 그를 '생각 없이 그저 남들이 다 하니까 시위에 참여한 사람'으로 전제하고, 그런 사람의 정치 활동이 비난받아야 마땅한 것이냐는 게 그분의 질문이었다. 물론 그분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전제가 틀렸다.'


정치 활동에서 '생각 없이 행동한다'라는 명제는 참이 되기 어렵다. 내 눈 앞에서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어가고, 내 친구의 생사도 알 수 없는 그 소년의 의지를 과연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한다'라고 단순하게 치부할 수 있을까? 사람이라면, 인지상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이웃이 죽어가는 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그걸 목격한 것만으로도 시위에 참여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내 주위 사람이 어이없이 죽어가는 현실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그걸 보고 드는 '막아야 한다', '부당하다' 등의 감정이 곧 '생각'이다. 기분은 일시적 느낌이고, 감정은 뇌가 복잡한 사고 회로 없이 바로 다다르는 생각이자 '이성'이다.


내 반박에 그분은 자신의 질문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며 다른 사례를 댔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 중 가슴을 드러내고 거리 행진을 벌이는 이들을 두고 어떤 누군가가 자신에게 '저들이 생각이 있는지 의문스럽다'고 말한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저런 행위는 누가 봐도 '혐오감'을 일으키는데 즉,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일으키는 행위로 시위하는 건 바보 같다는 논리였다. 그분은 그게 뭐 어떻냐고 대꾸했다지만, 그 대꾸는 곧 전제를 맞다고 인정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 전제가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상당한 논리적 비약이 있다고 본다.

첫째, 시위 방식이 효과적이지 못하기에 저들이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오판이다. 오히려 이 방법이 더 효과적이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했을까? 여성 인권은 100년 전부터 주장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100년 동안 여성 인권 수준은 참정권, 취업 기회 확대 등 일부 정치적 수준의 결정에 머물렀을 뿐 인식적으로는 여전히 바닥을 기고 있는 게 현실이다. 좋게 말한다고 들었으면 이미 예전에 바뀌었을 것이다. 만약 극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면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었던 여성 인권 문제는 영원히 사회적 논의 테이블에 올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욕을 하든, 사유를 하든 결국 논의를 촉발시켰기에 의미가 있다.

둘째, 혐오감을 무조건 나쁘게 보는 것이다. 가슴을 드러내고 행진하는 행위가 누군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겨우 눈살 찌푸리게 하는 게, 권위적인 폭력과 억압에 육체적 정신적 희생을 당하는 것보다 더 지켜져야 할 가치인 것인가? 혐오감은 방어 기제에 가깝다. 혐오감은 위험한 상황을 스스로에게 인지시키고 그 상황에서 회피 혹은 대항하도록 한다. 페미니즘 운동이 사회 전반에 야기하는 혐오는 현재 여성 인권 상황이 그만큼 위급하다는 신호다. 사이렌을 울려 지금 불이 났다고 알리는 형식인 것이다. 사이렌 소리는 듣는 순간 귀를 막고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시끄럽다. 그렇다고 우리가 응급차 출동 시 사이렌을 끄거나 소리를 줄이고 달리라고 하지는 않잖나.


물론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혐오도 있다. 인종, 세대, 계급 등 나와는 다르다고 느껴지는 것에 대한 혐오 기분을 정당하게 미워하도록 만드는 '혐오 감정'이다. 가령, 흑인을 대할 때 느껴지는 낯섦에서 오는 혐오 기분을 '저들은 게을러', '미개해'라는 논리로 정당화해 당연한 생각, 즉, 감정으로 만드는 것이다. 기분이 감정이 되면 그 기분은 정당화돼 장기 기억이 된다. 왜 우리는 예전에 싫어했던 친구를 10년 후 다시 만났을 때 싫어한 이유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감정은 기억하지 않던가. 이 역시 편리한 것을 좋아하는 뇌의 사고 효율화 기능 중 하나이다. 인종, 세대, 계급 갈등에서 오는 혐오 기분은 '다름'에서 오는 '낯섦'이 정확하다. 대자연 속에서 같은 종족 외에는 대부분 위험 요소였던 호모 사피엔스에게 다른 것을 보고 위협감을 느끼도록 하는 혐오감이 그들의 안전을 더욱 높였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 정치 세력은 이 같은 사람의 한계를 이용해 정치적 이익을 실현하곤 했다. 성소수자, 흑인 등이 오랫동안 피해를 입어왔으며, 중세 유럽의 여성 역시 좀 특출 나면 '마녀'로 취급당하며 고초를 겪었다.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혐오는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나쁜 것도 있지만, 우리가 몰랐던 사회의 위기를 감지하도록 하는 좋은 기능도 있다. 혐오는 단순히 갈등 유발, 나쁜 것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다양한 면을 지닌 것이다. 따라서 이제 사람들은 내가 지금 갖고 있는 혐오감이 단순 다름에서 느껴지는 기분인 것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세뇌된 감정인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살려달라는 '사이렌 소리'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이든지 혐오는 그 자체로 개인이나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걸 알리는 신호다. 혐오를 정확히 직시할 때 문제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곧 문제 해결을 위한 제대로 된 첫 단추 꿰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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