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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Dec 18. 2019

애매하게 사는 법

무 자르듯 정확한 삶은 진실이 아니다

요즘 겁이 많아졌다. 그래서 뭐든지 '안정'적인 거에 손이 더 자주 가게 됐다. 콘텐츠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넷플릭스의 수많은 신작을 제치고 나는 결국 평소 보고 싶었던 '스티브 잡스' 영화를 선택했다. 스티브 잡스를 다룬 영화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애쉬튼 커처'가 주연인 <잡스>이고, 다른 하나는 '마이클 패스벤더'가 분한 <스티브 잡스>이다. 이날 내가 본 건 후자다.


두 영화를 모두 봤다. 하지만 실험적인 영화는 후자 쪽이었던 것 같다. 스티브 잡스가 '맥'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날 당시의 상황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그려내고, 그 디테일한 상황 속에서 잡스의 말과 행동을 표현함으로써 '서사화'된 스티브 잡스가 아닌, '진짜' 스티브 잡스를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아마도 관객들이 원하는 건 진짜 잡스의 모습일 것이기에 이 영화가 좀 더 관객의 니즈를 충족한 영화라고 본다. 값어치도 있다. 그는 워낙 전설적인 인물이니, 그 인물을 섬세하게 표현한 영화는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 나는 워낙 의심이 많은 성격이기에 영화 속 잡스의 모습이 그의 100%라고 확신하지는 않지만, 60%는 맞다고 봤다. 아마 그는 독단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건 역설이다. 잡스가 만든 퍼스널 컴퓨터 덕분에, 아이폰 덕분에 세상은 과거보다 좀 더 평평해졌다. 모두가 자신만의 '표현 수단'을 가짐으로써 정보는 투명하게 공유되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데이터는 마치 '역사'가 되어 언제 어디서든지 쉽게 꺼내볼 수 있는 기억이 되었고, 망각이 선사하는 다양한 순기능을 무력화시켰다. (대부분 그 순기능이란 것은 위정자에게 유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세상을 평평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즉, 평평한 세상을 만든 '사건'이 역설적이게도 독단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사실 이와 같은 모순은 지구에서 흔하디 흔한 현상이다. 가령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평소에는 주위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했다거나,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만든 성과가 실은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경우도 여럿 있었다. 스티브 잡스의 '이상' 역시 일반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기에 그는 독단적으로 자신의 의사결정을 추진해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든 일에는 장점과 단점이 양면처럼 공존하기에 모순적인 현상 역시 사적 영역부터 공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발생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처럼 애매한 세상의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무 자르듯 정확하게 잘리는 논리와 이상을 원한다. 그게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편한 사고방식이니까. (누구도 편리한 걸 싫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만의 신념과 집단 논리 등 극단적인 주장에 매몰되게 되면 그 기준을 벗어난 모든 것들은 '틀린 것'이 되어 버린다. 스티브 잡스 역시 그의 엄청난 업적과는 별개로 인격이 좋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업적이 평가절하당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가깝게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시선에서 볼 수 있다. 가령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보며 아이의 사생활을 지켜주지 않는다며 불편하게 보고 아예 프로그램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JTBC의 <한 끼 줍시오> 역시 대한민국 최고 몸값을 받는 연예인들이 일반인들을 대접해주지는 못할 망정 일반 가정집으로 쳐들어가 한 끼 달라고 하고 사생활까지 캐묻는 데서 불편함을 느끼고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이건 단순히 한 현상의 단점일 뿐, 그 전체는 아니다. 하지만 하나의 단점을 전체로 보는 사고방식은 세상을 획일화하고, 애매한 진실을 가려 과거 야만의 역사를 다시 현대에 재현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거 야만의 역사란, 단면을 전체로 보고 '맞다' 모두가 함께 동의하는 사건의 반복이다. '아, 애매하다'라고 느끼는 일이 주위 도처에 널려 있을 때, 그 사회는 진정으로 현대적이고 건강한 역사가 쓰이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사고방식이 아닌 '언제든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이 실제 우리 세계의 진실에 더 가깝다.


한스 로슬링 저 《팩트 풀니스》는 극단적으로 인지하는 사람들을 계몽하는 도서로 자주 꼽힌다. 저자는 세상이 확실히 나아지고 있다는 통계 수치들을 제시하며,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만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진실을 가리는 극단적 사고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이다. 하지만 메시지에 이르는 논리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가 제시한 사례들처럼 세상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좋아진 만큼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가령 스마트폰의 발전으로 정보, 통신, 교통의 효율화를 이뤘지만, 동시에 인간관계의 파편화, 신종 사기 범죄, 몰라도 될 것까지 알게 되는 고통 등 다양한 문제 또한 생겼다. 내가 이 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건, 저자가 이분법적인 프레임을 들어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세상을 보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점이다. 진실은 '애매함'인데, 이분법적인 논리로 이 진실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 만약 저자의 논리대로 메시지가 설득되었다면 그건 진정으로 메시지를 이해한 거라고 보기 어렵다.


애매하게 산다는 건 마치 양자역학과 같다. 0일 수도 있고 1일 수도 있다는 양자역학처럼 사고해야 한다. 즉, 의심하되 믿어야 한다. 기대하되 해탈해야 한다. 사랑하되 미워해야 한다. 여유롭되 조급해야 한다. 공부하되 바보가 돼야 한다. 애매한 삶이란 그런 모든 애매함에 불안해하지 않고, 인정하고 긍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기 어렵다. 이전까지 인류가 해오지 않은 행위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애매하게 생각해 버릇하는 것은 세계의 진실을 마주하는 길이기에 결과적으로는 옳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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