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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Oct 15. 2019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나만의 퇴고

테드 창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를 읽고

1. 외모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왜 모든 생물은 유아기일 때 그 외양이 귀엽거나 사랑스러운 걸까? 왜 모든 생물은 노년기일 때 그 외양이 쭈글쭈글하고 거뭇거뭇한 걸까. 인간만 그런 것도 아니고 강아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식물만 그런 것도 아니다. 모든 자연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이 공통 현싱의 이유가 궁금했다.


추측은 이렇다. 외양은 눈에 보이는 겉으로 드러난 그 사람의 정보다. 이는 이성이 아닌 직관을 자극한다. 직관이 쌓이면 감성이 된다. 감성은 인간이 이성을 발휘해 계산할 시간이 부족한 긴급한 상황에 즉각적인 판단과 행동을 유발한다. 가령 응급한 찰나의 순간에 인간은 시각, 청각, 촉각으로부터 얻은 외부 정보가 입력되면 이성이 작동하기도 전에 황급히 신체적 반응을 일으켜 그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가령 뜨거운 것에 손을 댔을 때 황급히 손을 떼거나, 징그러운 걸 보고 바로 눈을 감아버리는 행동 등이 그러하다. 따라서 아무리 이성적이어서 초지능을 갖고 있는 인간일지라도 감성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부분은 테드창 단편 <이해>에 잘 서사화되어 있다)


아기의 외모로부터 드는 감성은 ‘포용’이다. 반면에 노인의 외모로부터 느껴지는 감성은 ‘배척’이다. 이러한 감성은 아기를 사회 구성원에 참여시키는 반면 노인은 자연스럽게 배척하게 만든다. 이는 지구에 사는 모든 동식물에게 적용된다. 새끼 동물, 새끼 물고기, 봉우리 핀 꽃에는 온 지구가 애정을 갖고 잘 자라도록 지켜주려 한다. 반면 살이 축 쳐진 노회한 동물, 움직임이 둔해진 물고기, 시들시들한 꽃 등은 모두 무리로부터 배척당하고 소외된다.


그렇다면 아기는 왜 용인되고 노인은 배척되어야 하는가. 자연의 순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리는 순환이다. 탄생과 죽음의 반복인 것이다. 탄생한 것은 자연 순환 주기를 따라야하는 존재인 반면 죽음에 임박한 것은 그 주기에 따라 자연스레 쇠퇴해 소멸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순환 주기는 정체되어 버리니까. 하지만 생명체는 굉장히 강한 생존 의지를 지니고 있기에 영생이라는 헛된 욕망까지 꿈꾸기 마련이다. 아마 여기서 쉽게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를 가진 생물종만이 살아남았을 것이며 그 장치 중 하나가 ‘외양’이 선사하는 직관적 느낌이 아닐까 생각한다. 갈수록 추해지는 외모는 주위 사람과의 정을 떼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고, 그를 못 놓는 사람 혹은 자기 스스로 놓기 싫은 사람 둘 다에게 모두 죽음을 준비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모든 건 예견되듯이 죽음 또한 가까워질수록 그 예견을 드러낼 테니.


+사족) 잠깐 딴 길로 새자면 이 관점에서 ‘뉴트로’가 생각났다. 뉴트로는 어쩌면 영생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문화이지 않을까? 내가 예전에 사랑했던 반짝반짝했던 것들이 다시 빛나길 바라는 마음. 자신은 그러지 못하지만 나의 추억이 깃든 것들은 후세에도 전해져 계속 살아났으면 하는 마음. 인간의 허무한 불멸의 욕망.

그런 점에서 뉴트로가 한 사회의 주축이 된다는 건 곧 그 사회를 주도하는 기성 권력이 늙었다는 걸 방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혹은 늙은 기성 권력이 젊은 세대의 주류화 움직임을 막아 혁신이 이뤄지지 못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 사회에 뉴트로가 유행한다는 건 그 사회의 순환이 막혀 곧 죽음이 임박했다는 신호일 거다. 사회가 죽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



2. 외모 지상주의는 나쁜가?


외모가 상대의 가치를 판단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정보라면 외모지상주의를 나쁘다고만 볼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 외모만 보고 바로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을 두고 속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격을 보고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평가된다. 그게 그 사람의 진의를 알아보는 거라고 우리 모두 배웠다.


그런데 결국 성품도 타고나는 것이기에 외양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보통 선천적 성격은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현한다는 게 통설이다. 또한 같은 환경에서도 내면에 타고난 성격이 다르다면 다르게 발현한다. 즉 타고난 성격과 환경적 경험의 화학적 결합이 바로 그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타고난 성격과 운명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환경적 경험이 모두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는가? 물론 성격은 스스로 수련해 바꿀 수 있다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수련해 바꾸려는 그 ‘자유 의지력’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자유를 두려워해 의지하길 좋아하고, 누군가는 자유를 사랑해 쟁취하는데 목숨을 걸지 않는가. 그렇다면 자유 의지도 타고난 것 아닌가.


또한 외모를 보고 직관적 판단을 내리도록 시스템화된 동식물에게 그 외모를 배제하고 이성적 판단을 내리라는 건 인간의 과한 도덕적 고결이자 신적 이상에 가깝다. 그건 또다른 부작용만 야기할 뿐이다.


성격을 보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외양을 보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는 없을까? 물론 전자의 사랑이 후자의 사랑보다 어렵고 고차원적인 행위이기에 다르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고차원적이라고 여겨지는 그 일이 실은 컴퓨터가 수학을 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일 수도 있다. 반대로 컴퓨터가 인간이 아주 쉽게 하는 걷기, 뛰기, 눈 깜박거리기 등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고차원적인 걸 잘하는 사람은 흔히 저차원적이라 불리는 걸 어려워할 수 있다. 이런 시스템 작동 방식조차 타고난 것이라면 무엇이 더 낫다고 판가름하기 어렵다.


그냥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보듯, 성형한 사람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일까. 둘 다 노력해서 얻은 것 아닌가. 타고난 것보다 노력하는 것에 더 가중치를 두는 게 현대 사회의 합의이다. 따라서 노력이 가미된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너무 나쁘게 보지 않는 게 바람직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외모지상주의를 단순히 찬양해서도 경시해서도 안 된다 본다. 그저 외모지상주의를 당연한 삶의 한 부분으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너무 과할 경우 성찰을 통해 그 부분은 바꿔나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무엇이든 과잉되거나 결핍되는 건 문제를 야기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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