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로울 령 Aug 22. 2019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현실에 없어

제발 정신 차리자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연예인 부부의 이혼 소식으로 포털 사이트가 혼란하다. 그 사태를 지켜보면서 나는 자꾸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 인생의 가장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나의 과거 연애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는 어릴 적부터 연애에 대한 높고 푸른 환상 같은 게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는 그 환상이 '진짜'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나도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드라마 같은 사랑을 할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실제로 나의 연애에 대한 환상이 조금 이뤄진 부분도 있었다. 처음으로 본 타로 점괘에 딱 맞춰 '물이 많은' '해외'에서 나의 첫사랑을 만났다. 그는 환상에 사로 잡힌 나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고(조건이라는 단어가 사랑의 맥락 속에서 좋은 어감의 단어는 아니지만, 나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자신만의 조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 뺨치게 나를 사랑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나의 환상엔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걸 견딜 수 없었던 나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인 '함부로 헤어지자라고 말하는 것'을 5번 정도 행했다. 나의 변덕에 지친 그는 결국 날 놓아줬는데, 그때부터였다. 내가 평생 보지 못했던 내 안의 집착을 마주하게 된 건.


6개월을 만났는데, 집착은 2년을 갔다. 왜 그리 집착했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내 안의 결핍 때문일 수도 있고, 진짜 헤어질 줄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무튼 집착을 하는 동안 그는 나에게 모진 말을 많이 했다. 차가운 태도에도 나는 그를 포기하지 못해 밤마다 전화하곤 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얼마 살지 않은 내 인생의 암흑기이자 흑역사다.


돌이켜 보면 내가 잘못한 것이다. 친구들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지나친 자기 비하라고 했지만, 객관적으로 내가 그 사람이었어도 내가 감당이 안 되었을 것 같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 같은 모습을 그에게 바랐으니, 그걸 감당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사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다. 환상 속 유니콘과 같다. 외모, 능력, 성격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이 보잘것없는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인처럼 모든 걸 희생하고 맞춰 주는 게 말이 되는가.  모든 사람은 대부분 자기중심적이고 특히 잘난 게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한 성향이 강하다. 사랑이란 게 한번 빠지면 모든 걸 걸게 만들어주지만, 사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에게 자기 자신만큼 사랑을 느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나르키소스 같은 극단적인 형태까지는 아닐지라도 잘난 사람은 자기 잘난 맛을 안다. 그렇기에 드라마에 나올 법한 사랑을 타인에게 느끼기란 매우 드물다. 아마 사랑이란 결핍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불완전해서 결국 타인을 찾게 될 수밖에 없다.


타인을 향한 사랑은 일방적일 수 있으나 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맞다고 타인도 맞다고 생각해줄 거라는 건 오만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어도 상대가 모두 수용하고 받아줄 거라는 건 미디어가 낳은 편견이다. 모든 관계는 사랑에서 시작하지만 옥시토신이 내뿜는 호르몬 효과가 지나기 전에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조화를 이뤄야 비로소 관계는 안정되고 완성된다. 그 양보와 배려가 내 기준에만 맞고, 상대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그건 진정한 양보와 배려가 아니다. 그 기준을 맞춰가는 게 조화다. 기준 협의에 실패하면 그 관계는 끝이거나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 사이의 끝에 귀책사유는 '외도'와 '가족 부양 책임 회피', 그 외 '보편적 윤리 위반'이 아닌 이상 누가 더 크다고 묻기 어렵다.


하지만 최근 벌어진 연예인 부부의 이혼 소식에는 귀책사유에 대한 여론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듯싶다. 마녀사냥에 가까운 댓글과 몰아가기에 이상하게 나만 자꾸 죄스러워졌다.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그게 아니야 바보야!'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하지만 그 둘이 진짜 사랑한 건 맞는 것 같다. 사랑은 모순적이다. 고귀함만큼이나 천박하기도 한 것이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