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로울 령 Feb 02. 2020

그게 원칙이라면,

왜 이 한마디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선비충', '프로불편러', '청학동 가라' 등 요즘 온라인 탑골공원 댓글창에서 이런 표현이 자주 보인다. 이 표현들은 주로 별 것 아닌 것(이라고 생각되는 경우) 임에도 불구하고 언짢아하는 상대를 일갈하기 위해 쓰인다. 예전에는 괜찮다고 생각해서 공공성이 있는 TV에서 아무렇지 않게 비쳤던 장면들이, 세월이 흐른 요즘에 와서 다시 보니 불편한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반면, 그것들에 향수를 갖고 여전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옛 것에 불만을 갖고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불편하다.


전 세계가 인터넷망으로 연결되면서 외국에서 유행했던 정치적 올바름, PC 감성이 우리나라에도 보급됐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PC 감성을 장착하게 되면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좀 더 상대의 언사가 내포하는 '신호'를 수신하는 안테나가 많아진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처럼, 예의와 경우에 벗어난 일은 참지 않긔에 나한테, 혹은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차별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만한 신호가 읽힌다면 불편해진다. 가령 본인이 장애인이 아니지만, 장애인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는 것처럼.


그러나 여전히 그 시대 감수성에 젖어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여기에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불편하다. '여태껏 괜찮았고, 모두가 괜찮아했는데, 이제 와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그건 역으로 본인이 PC 안테나가 없었을 당시를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충돌이 생기는 것이다. 각자 이성이 아닌, '기분'과 '느낌'으로 충돌이 생기는 것이다.


기분 간 충돌은 마치 합리적 이성이라고 착각되는 감정을 낳는다. 상대에 대한 부정적 기분, 짜증과 분노 등이 장기 기억화되면 비슷한 상황과 사람을 만날 때 그 기분을 저장한 기억이 이성의 탈을 쓴 채 자동으로 소환되는 것이다. 그것이 '감정'이다. 감정과 감정의 충돌이 벌어지면 그 사이에 어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중재안이 없는 한 그 둘은 '타협'하기 어렵다. 그래서 '충'들은 여전히 혐오받고, '충이라 불리는 이들'은 차별이라며 역으로 충 혐오자들을 혐오하는 평행선이 그어진다.


어떤 칼럼에서 '그게 원칙이라면'이란 표현을 읽었다. 그 말이 내게 유독 크게 다가온 건, 아마 이 감정 간 대립에 마침표를 찍을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원칙이라면'의 뉘앙스가 마치 '그게 나의 평소 감정과 평소 알고 있던 사적인 상식과 어긋날지라도 원칙이라면 수용하겠다'는 것으로 읽힌 것이다. 맞다. 이 사회는 나 혼자만 사는 공간이 아닌, 원칙과 질서 위에 단단하게 세워진 곳이 아닌가.


물론 그 원칙이란 게 시대에 따라 다르고, 과할 때는 누군가에게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에 무조건 옳다고 옹호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원칙이란 선(善)과 선(線)으로 누군가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고 미워하고만 있을 수 없다. 나와 다른 감정의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무시할 수 없다. 그들과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간에서 같이 살지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을 소환할, 타협을 위한 원칙은 필요하다. 일일이 하나하나 자로 잰 듯한 원칙이 아닌, 넓은 범위의 헐거운 타협과 원칙이면 되지 않을까? 가령,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원칙. 그들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원칙. 내 틀 안에 들어오면 좋은 거고 아니면 이상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원칙. 다 함께 배려하고 맞춰주고, 공존하려는 원칙. 그 원칙의 전제는 아마도 '어디선가, 어느 그룹 안에선가 나도 '이상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나로서 오롯이 존중받고 싶다'가 돼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남들을 그렇게 대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레 떠오르기 마련이니까. 그게 원칙이라면.

매거진의 이전글 연대하자면서, 진짜 연결되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