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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Feb 20. 2020

차별의 교차로에 있는 사람들에게

포용할 것이냐 배제할 것이냐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막상 머릿속으로는 완벽하게 이뤄질 것 같은 일들이지만, 실제 현실에서 이행하는 과정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소한 부분들이 튀어나오면 그게 너무 신경 쓰여서 생각과 달리 방향을 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다이어트, 금연, 자격증 따기 등이 대표적이지만, 나는 '포용' 역시 같다고 본다. 인류학적 관점으로 볼 때, 피의 전쟁 끝에 살아남은 종자들의 후예인 현대 인류에겐 포용보단 편 가르기와 배척, 화염에 휩싸인 분노하기가 더 쉬운지 모르겠다. 사람이란 불편한 걸 가장 싫어하고 고통스러워하니, 긍정의 요소인 '포용'을 불편하게 해야 한다면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냥 포기해버리기 쉽다.


'교차 차별'이란 그래서 만연한 게 아닐까 싶다. 최근 경향신문에 실린 교차 차별에 대한 기사는 내가 평소 소위 진보적이라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늘 겪어왔던 모순된 감정과 맞닿아 있었다. 페미니즘을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며 실제 시위에 참여하는 등 행동까지 하는 A지만, 능력에 따른 차별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성소수자 인권을 외치며 퀴어 퍼레이드에도 참여하는 남자 B는 여성 혐오적 요소가 가득한 만화책을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하고 주위에 공유한다. 노동 실태를 고발하는 소설을 연재하는 C 작가의 작품 속에 여성은 '감성적', 남성은 '이성적'이라는 고정된 성역할이 클리셰처럼 장착돼 있다. 이들 모두 자신이 민감한 사안에서는 분노하고 연대하고 공감해주길 희망하지만, 정작 나와 관련 없는 소수자 차별에 대해선 '무지'하다. 솔직히 관심 없는 것 같다.


웹툰 <송곳>에서 나온 대사로 유명한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말은 권위적인 갑을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 모든 관계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는 걸 여실히 절감한다. 다들 특정 기준에 따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갑'이 되면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을' 문제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을'이 될 때는 자기가 서있는 곳에서 겪는 고통과 부조리만 보며 불평등하다고 아우성친다. 남의 것에 공감해줄 여유 따위는 없다. 내 코가 석자다. 그래서 진보적인 남성은 자신의 기회를 빼앗는 부조리한 '자본과 정치권력' 문제만 견제하고, 진보적인 여성은 '여성'이란 프레임 안에 자신들을 가두는 '남성 권력' 문제에만 반응하고, 성소수자는 오직 '성소수자 권리'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런 사람들이 김지혜 저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는 다면 세 문장에서 뜨끔할 것이다.


-"우리는 한 곳에만 서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은 수많은 다중적 지위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기도 하지만, 차별을 할 수도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신화일 뿐이었다”


무슨 이유든지 간에 '차별하지 말고 동등한 인간으로 대해달라'는 사람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 주장을 하는 사람 역시 누군가를 차별하지 말고 동등한 인간으로 대해줘야 한다. 하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 여전히 미성숙하다.


모든 진보적 가치는 개혁적이다. 그런데 군주론을 쓴 15세기 정치인 마키아밸리는 개혁을 "성공이 의심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성공이 '의심'될 수밖에 없는 건 개혁으로 생기는 새 질서의 혜택이 진보 세력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노동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운동으로 ‘주 52시간제'가 도입되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생겼다. 페미니즘 역시 '낙태죄' 폐지와 '성인지 감수성'이 판결 논리로 적용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노동자는 죽어가고 여성들도 여전히 성산품화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왜 그럴까? 이번 트랜스젠더 군입대, 여대 입학 사건을 통해 그 이유를 짐작했다. 노동권과 여성권이 신장된 반면 동성애자는 여전히 커밍아웃을 하기 어렵다. 트랜스젠더는 군대와 여대라는 성적 권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집단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장애인이 만 65세가 넘으면 정부의 활동 지원이 끊긴다는 사실이 보도됐지만 분노하는 여론을 찾아보기 어렵다. 즉 외연 확장이 부족한 것이다. 게다가 어느 정도 세력을 구축한 집단은 자기 자리를 잡고 깃발을 꽂아 스스로 또 다른 ‘기성 권력’이 되려한다. 자기 말이 진리고 우리를 모독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구는 건 ‘종교’ 아닌가.


문제는 거기서 발생한 모순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들을 차별하지 말라면서 다른 집단의 차별은 괜찮다는 모순은 진영의 확장을 저해한다. 극단에 치우친 강성들만 남은 진영에 중도는 어떤 지지도 해주지 않는다. 아웃사이더로 밀려나게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성공의 희망은 있다. 강성끼리 연대하는 것이다. 가령 강성한 자본주의자와 강성한 페미니즘이 연대하는 것이다. 두 집단은 서로 이해 충돌이 없기에 실제로 실행 가능성이 높은 결합이다. 최근 한 정당의 당 색깔을 보니 나의 의심이 현실화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강성과 강성의 만남은 강성의 모순을 강화시킬 뿐이다. 혜택은 또다시 차별적일 것이며 두 집단의 교집합 혹은 최상위자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소외될 것이다. 이는 곧 내분을 야기할 것이고, 유럽의 극우정당들처럼 그 세력을 잃게 될 것이니, 잠깐의 승리밖에 얻지 못하겠다. (그러나 사회적 비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자신은 도덕적으로 고결하고 옳다고 믿는 인간이 넘어야 할 산이 교차차별 아닌가 싶다. 그 산은 대게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인지부조화를 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자신이 틀렸다는 걸 부정하거나 인정하거나. 우리는 모두 안다. 인정하는 길이 가장 쉽고 빠르게 산을 넘는 방법이라는 것을.


결국 ‘포용’밖에 없지 않을까.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라서 그들의 권리에 관심 없다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내가 남자기 때문에 'n번방' 같은 여성 성범죄에 수많은 공권력이 투입돼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을 설득시키기 어렵다. 나는 장애인이 아니라서 장애인 인권에 관심 없다는 걸 그럴 수도 있다고 용인하는 사회에서는, 심각한 양극화와 불평등은 알 바 아니라고 하는 사람을 비판하기 어렵다. 내로남불적인 인간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 역시 '인지상정'이니까.


물론 포용은 불편하고 낯설다. 뭔가 희생한다는 억울한 느낌마저 든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역으로 자기가 서 있는 곳을 상기하면 어떨까. 그곳이 싫고 지금보다 더 나아지길 바란다면 결국 감내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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