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로울 령 Mar 18. 2020

역사로 정치를 배웠습니다만

정치가 재미있는 사람의 시선과 목소리

정치는 사람을 관찰하길 좋아하는 내게 참으로 흥미로운 관찰 거리를 제공해준다. 특히 최근 총선이라는 거대한 정치 이벤트를 앞두고 더더욱 흥미로운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으니. 진짜 예능 프로그램, 막장 드라마보다도 더 재미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학창 시절 역사 과목을 좋아했다. 역사는 기득권의 기록이어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곧 정치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 같았다.


역사는 거시적으로 볼 때 특정한 패턴이 있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 세상을 뒤엎고 지도자로 군림한다. 이후 몇 세대에 걸쳐 세습이 이뤄지고 나면 기득권은 부패하고 민란이 들끓는다. 이때 또다시 영웅적 인물이 나타나 신흥 세력을 이끌고 혁명을 주도한다. 실패하면 반란이고 성공하면 건국이다. 이 과정이 엎치락뒤치락 계속 반복돼서 이어져 오는 게 역사의 전부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흥미로운 건 이 엎치락뒤치락의 대응 양상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진화해간다는 것이다. 가령 고대 국가 시절에는 국가가 몇 개 없었으니 불만이 있으면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서 나라를 세웠다. 부여의 왕자들이 내려와 백제와 고구려를 세우는 식이다. 하지만 땅은 제한적이니 쟁탈전을 벌이며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자 아예 하나의 나라로 흡수 통일을 해버린다. 통일신라다. 이 역시 부패하니 제도의 틀은 유지한 채 '왕'을 바꾼다. 고려다. 하지만 제도 역시 오래되면서 곳곳에서 '관행'이라는 이름의 얄팍한 별칙들이 생겨난다. 이를 토대로 또 부패가 성행하자 아예 제도 자체를 갈아엎고 새로운 틀을 설계한다. 조선이다. 이렇게 후려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반복되어온 이 엎치락뒤치락은 항상 그 시대에 맞는 명분과 전략이 함께해 변화해왔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 싸움은 현대에도 진행 중이다. 정치에도 사회 트렌드가 반영되기 마련인데 최근에는 개인주의와 공정성이 화두이기에 이와 연관된 정책들이 많았다. 특히 사표를 방지하기 위해 최근 선거 제도가 개편되었는데, 이 제도가 좀 말썽이다. 처음에는 거대 정당의 꼼수로 작용하는가 싶더니 최근에는 같은 진영의 내부 주도권 싸움의 도구로 전락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일들도 벌어지고 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지금 이 시국과 닮은 시대는 어디일까? 얄팍한 내 역사 지식을 총동원해 짱구를 굴려보면, 조선 중후반기 '붕당 정치'가 떠오른다. 같은 분파 안에서도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싸운다. 이중 가장 득세한 서인은 또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고, 또 득세한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나뉜다. 이 과정에서 본래 각 분파의 '신념'과 '목적'은 사라지고 ‘승리’만이 남은 채 승리의 결실을 나누는 부정부패가 만연한다. 결국 조선은 60년 간 세도 정치의 시기로 접어든다.  


이처럼 신하 간 세력 다툼이 치열했던 건 아마 '절대 권력'이 부재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선조 때부터 이어져온 왕들은 모두 직계가 아니다. 혈통을 중심으로 권력 세습이 이어졌던 시기에는 그 자식이 정실부인의 자식인 '직계'인지, 첩의 자식인 '방계'인지가 중요했다. 선조는 후궁의 자식이었다. 따라서 그 이후부터 왕들은 정실부인의 소생이라고 할지라도 '방계'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게다가 두 번의 전란에서 왕은 왕 다운 리더십을 보이지 못했다. 반정으로 두 번이나 왕을 갈았던 신하들에게 왕은 더 이상 '절대적'으로 군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왕은 절대 권력이 없으니 신하들의 주장을 '기다 아니다' 판단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붕당 정치의 산물인 ‘예송 논쟁'은 왕이 상복을 몇 년 입는지를 놓고 싸운 것이었다. 만약 왕의 힘이 셌으면 그런 논쟁쯤이야 당연히 하루 만에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왕의 권력이 절대적이지 않았기에 대놓고 신권이 왕권을 희롱하는 데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싸웠다간 반정으로 또 언제 반정으로 자기 목이 날아갈지 몰랐을 테니, 정치적 책임을 질 수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런 절대 권력의 부재는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절대 권력이 있었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가 저물어 가고 국정농단 등이 벌어지면서 절대 권력의 부재가 생겼다. 이 부재한 권력 자리를 놓고 여러 정치 세력이 아웅다웅하고 있는 게 작금의 정치 현실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없다. 그리고 누가 더 낫다고 공인해줄만큼 튼튼한 정치 지지 기반, 힘을 가진 정치 지도자도 없으니 거의 난립에 가깝다. 괜히 작년에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나라가 분열된 게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 민생은 없다는 것이다. 보수든 진보든 이들은 또다시 이념으로 국민들을 이간질하기 바빴다. 실제로 지금 총선을 앞두고 두 세력이 내세우는 '대통령 심판'과 '촛불 정신 실현'에는 각 진영의 추상적인 정치 신념만 있을 뿐 현실적 대안과 비전은 없다. 역사가들이 붕당 정치를 비판하는 주된 이유도 둘이 싸움만 하느라 민생을 챙기지 않았다는 데 있다. 지금 그들이라고 다를까. 어느 누구 하나 도덕적 우위를 점한다고 보기 어렵다.


문제의 원인이 '절대 권력과 민생의 부재'에 있다고 한다면 해결책은 '민생이 절대 권력화' 되는 것이지 않을까. 물론 뻔한 해결책 같지만 'Classic is the best' , 결국 뻔한 게 생각에서만 그치지 않고 실행될 때 그 효과는 가장 클 것이다. 게다가 정치적 결정으로 인한 책임은 예나 지금이나 시민의 몫이었다. 어차피 책임의 결과가 같다면 선택도 시민 스스로가 하는 게 낫다.


권력에 눈이 먼 정치인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엇을 바라는 건 순진한 생각에 가깝다. 정치인에게 요구는 하되, 요청을 받았을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등을 모두 낱낱이 지켜본 후 본인의 판단에 따라 '표'로써 그들에게 상벌을 줘야 한다. 그러면 정치인이나 정파성을 띤 언론이 아무리 정치 판세를 가늠하며 온갖 꼼수를 부려도 소용이 없다. 그들의 빅픽쳐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중요하다.


선거 때 시민들에게 필요한 건 '선거 리터러시'가 아닐까.


"우리 정당과 함께 OO정당을 찍어주세요"라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 말의 진의를 알 수 있도록 저 정당과 OO정당 간에 관계를 밝히는 정보를 찾아보는 것이다.

"OO 정신을 실현해야 합니다!"라는 말이 그럴듯해 보여도 그 안에 담긴 정신의 정확한 의미와 목적이 무엇이고, 그게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의심하는 것이다.

"저를 뽑아주신다면 ~하겠습니다"라는 의원의 말을 곱씹으며 그게 진짜 가능한지, 그리고 왜 필요한지, 그리고 저 자가 정말 해낼 수 있는지 등 관련 정보를 찾아보며 고민하는 것이다.


아마 이것들을 모두 해본다면, 대부분 제대로 된 의원이나 정당이 없다는 걸 실감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을 주시하고 표심에 반영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의원과 정당들도 지금처럼 '승리'에만 눈이 뒤집혀 민생이 기반이 되는 현실적인 비전을 등한시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선거 관련 정치 정보는 언론사들이 유튜브에 개설한 디지털 뉴스 채널로 이해하기 쉽게 콘텐츠화 해놓은 경우가 많다. 나 같은 경우 지상파 디지털 뉴스 채널을 일주일에 하루씩 날 잡고 모두 훑어보는 게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 중요한 건 한 가지 사안에 대해 '여러 언론사'의 뉴스를 모두 보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언론의 '정파성'이 고개를 들어 마음대로 우리의 생각을 조정하려 들지 가늠할 수 없다.


SBS- 스브스뉴스, 비디오머그

KBS- 크랩, 팩톡

MBC- 엠빅뉴스, 14F


최근 코로나 사태를 거치며 알게 된 점이 하나 있다. 이제 모두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정보 검색에 능숙해지면서 자신이 관심 있는 정보는 정통 언론사 뉴스뿐만 아니라 '찌라시' 내용까지 꼼꼼히 찾아보며 관련 정보에 해박해진다는 것이다. 선거 기간만이라도 모두가 정치 고관여자가 되어 해박한 정보 탐색자가 된다면 그게 곧 민생이 절대 권력의 공백을 메우는 길이 되지 아닐까? 가령 정보 탐색 과정에서 특정 정당의 비례대표가 '중대 범죄' 전력이 있다면 퇴출을 요구하고, 먹히지 않는다면 그 당을 찍지 않는 식으로 시민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런 정치사는 내가 본 한국사에는 없었다. 새로운 역사다.

매거진의 이전글 차별의 교차로에 있는 사람들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