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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Mar 26. 2020

라테와 훈수

편향의 블랙홀이 도처 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요즘 세상의 크기에 새삼 놀라고 있다. 신천지가 언론에 한창 보도될 때 교인의 숫자가 대략 20만 명이 넘는다는 뉴스에 기겁을 했다. 사이비 이단이 20만 명이라니. 게다가 20대 여성의 비율이 많다는데, 그중에 내가 아는 사람도 있을 성싶었다. 또 최근 n번방 사건에 가담한 사람이 총 26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게다가 그 사람들 대부분이 10대, 20대 학생 혹은 직장인이라고 하니, 그중에 내가 아는 사람도 있을 것만 같다. 성 범죄자가 26만 명이라니.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온 '두 세계'라는 표현의 의미가 피부로 와 닿는 숫자였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이 4980만 명이나 있고 비율적으로 보면 두 세계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숫자다. 그럼에도 고작 '한 명'인 나에게는 위압적이다. 한 개인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의 최대치가 고작 150명 남짓이니 20만 명과 26만 명에 쫄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극단적 이념에 휩싸인 집단의 숫자가 만 명대를 넘어간다는 건 곧 현실 세계를 왜곡할 가능성이 높은 '블랙홀'이 도처에 있다는 뜻과 같다. 가족 중 한 명, 혹은 친구, 지인의 한 명이 신천지이고 그들의 숫자가 많다는 건 곧 나도 신천지 세계에 초대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비자가 말한 '세 사람만 우겨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속담처럼 그 집단에 속한 한 명에게 발목이 잡혀버리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안으로 온몸이 빨려 들어가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블랙홀이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사람을 공포에 빠트린다.


책 『팩트풀니스』에는 인간의 10가지 본능이 현실을 왜곡해 인식하도록 한다고 말한다. 그중 '부정 본능'과 '극단 본능'이 있는데, 이는 대개 '공포'와 '불안'의 감정과 연관돼 있다. 2016년 총선 이후 참패한 제3 정당 후보자들에게 "질 줄 몰랐냐"라고 물어보던 한 인터뷰가 떠오른다. 해당 인터뷰이는 "내 주위에는 지지자밖에 없어서 자신이 당연히 이길 줄 알았다"며 억울해했다. 그는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괜히 쎈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이길 거라고 믿었던 눈치였다. 당시에는 그런 후보자를 큰 그림을 볼 줄 모르는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여겼다. 하지만 당시 후보자는 당선될지 말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엄청난 압박감과 불안감에 떨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건 더 크게 보고 나쁜 건 부정하려는 심리가 커졌을 것이다. 그래야만 그 불안을 떨칠 수 있었을 테니까. 정치인도 결국 사람이다. 하지만 불확실한 상황에서 가장 생존 확률을 높이는 건 '올바른 판단'이다. 그리고 최대한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생존 본능을 거스르면서까지도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솔직히 나약한 한 사람 혼자서는 하기 어렵다.


최근 우연히 유튜브에서 김경일 아주대 교수가 강연한 내용을 봤다.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의 '훈수'가 조직의 문제 해결력을 높인다는 내용이었다. 당사자는 불안과 편견에 갇히기 쉽기에 간과할 수 있는 문제의 핵심 원인을 어떤 이익과 불이익에 관계없는 사람만이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상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툭툭 아무렇지 않게 모르는 사람에게 훈수를 두는 건 한국만의 문화라고 한다. 이런 훈수가 '유익하다'는 전제 하나, 그리고 훈수를 받는 상대가 이를 '지혜롭게 수용한다'는 전제 둘이 조화를 이룰 때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이성적인 사고, 팩트풀니스적 사고'를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한국은 팩트풀니스하기 좋은 환경 아닌가 싶다.


하지만 최근 훈수는 '라테'로 통칭되며 위축되어가고 있다. 훈수 두는 사람에게 "네가 뭘 아냐"며 화를 내고, 그들의 훈수를 귓등으로 흘려듣는다. 물론 진짜 뭘 모르고 두는 훈수도 있다. '사실'이 아닌 것에 기반한 훈수다. 또한 '변화'를 디폴트 값으로 두지 않는 훈수다. 보통 후자가 '라테'로 통칭되며 격하된다. "라테는 말이야..." 하면서 옛날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그 안에는 변화한 '지금'이 없기에 훈수가 아닌 라테 타 먹는 이야기가 된다. 진정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는 훈수와 아닌 것을 구별하는 지혜, 훈수를 두는 사람 역시 그것을 구분해 말하는 지혜가 둘 다 필요하다.


대개 훈수를 흘려듣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서 오는 직관에 강한 믿음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멍청함이라고 생각한다. 세종대왕을 똑똑하다고 하는 건 한글을 창제한 개인의 천재성뿐만 아니라 자신이 모든 것을 완벽히 해낼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각계의 능력 있는 '사람'을 발굴하고 등용했다는 점에서 통칭된다고 한다. 보통 똑똑한 사람은 자신 말고 주위 사람은 모두 멍청하다고 생각해 혼자서 모든 걸 해내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뿐더러 해내더라도 과한 업무에 건강이 상해 일찍 죽기 십상이다. 그래서 '집단의 리더'뿐만 아니라 각자 자신의 삶을 리드하는 모든 '개인'에게 훈수는 자신의 문제를 성찰하는 계기로 한 번쯤 곱씹어 볼만한 가치가 있다.


만약 자신에게 훈수를 두는 사람이 없다면 주위를 되돌아봐야 한다. 내가 신천지인데 주위에 신천지 교인 20만 명만 있다면, 이만희의 교리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없을 것이다. 역시 내 주위에 n번방 가담자 26만 명만 있다면 불법 촬영물은 범죄라는 시선도 없을 것이다. 그건 내 생각이 옳아서가 아닌, 내 주위에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는 불완전하고, 나는 내가 최대로 맺을 수 있는 150명에 영향을 받기 쉬우며, 그들의 성향이 특정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다면, 그렇게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4980만 명도 있다는 게 '팩트', 블랙홀 밖 현실이다.


물론 4980만 명이 틀리고 20만 명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전에 4980만 명이나 되는 숫자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하루 정도는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세 사람만 우겨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속담은 반대로 '미혹되지 않으려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충돌 과정에서 혹자가 "당신은 너무 고집이 쎄"라던지, "융통성이 없다"던지, "넌 네 말만 옳다"고 한다면 한번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혹시 놓치고 있을지 모를 '팩트'를 보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어려운 뉴스를 찾아보고, 공부를 하고, 목소리를 내며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 간 충돌을 견딜 때 사람은 선택으로 이뤄진 삶에서 '올바른 판단'이라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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