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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May 20. 2020

'혹쉬'가 필요해

'말' '하기'의 입체성

최근 유튜브 콘텐츠를 보면 자막으로 '혹쉬' 혹은 'Hoxy'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누군가가 이 단어를 썼고, 대중적으로 유행이 된 것이다. 이 유행어의 창시자는 다름 아닌 5살 어린이 윌리엄 해밍턴이다. 호주 출신 개그맨 샘 해밍턴의 아들로 신생아 때부터 KBS2TV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해 5살인 현재까지 활약하고 있다. 아기일 때는 귀여운 외모로 수많은 랜선 이모를 양산하더니 어엿한 어린이가 된 요즘은 순수함이 묻어나는 예쁜 말과 행동으로 현실 때가 잔뜩 묻은 어른들의 힐링제이자 리프레셔가 되어주고 있다.


방송에서 윌리엄이 사용한 '혹쉬'의 맥락은 다양하다. "망고 맛 나나 혹쉬?"나 "삼촌 배고픈가 혹쉬?" 등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할 때 사용한다. 또 "내 소원 들어주나 혹쉬?"나 "나 혹쉬 먹어봐도 되나?"처럼 부탁을 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예쁜 여자애 앞에서 "나 멋있나 혹쉬?"하거나, 바닥이 닿는 수영장에서 "한 손으로 설 수 있나 혹쉬?"처럼 귀여운 허세를 부릴 때도 사용한다. "혹쉬 왜 나 안아주는 건가..."처럼 직설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당혹스러움을 표현을 할 때도 사용한다. 전반적으로 윌리엄의 '혹쉬'는 타인을 향한 '자신'만의 생각과 추측을 완곡하게 표현할 때 자주 쓰인다.


이 표현이 유행어가 된 건, 아무것도 몰라 순진하게 자신의 생각을 곧이 곧대로 보이기 마련인 어린이가 써서 특별한 점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말 안에 '내 생각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른다'라고 염려하는 마음이 뉘앙스로 서려있는 점이 더욱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씨가 다름 아닌 어린이를 통해 드러날 때, 현실 때가 잔뜩 묻은 어른들은 더 감화되기 마련이니까. 비단 어린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채 '내 생각'을 마구 쏟아내 상대를 찌르는 경우는 흔하다. (찔림)


2005년, 5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는 비슷한 문제의식이 서린 내용이 나온다. 극 중 남자 주인공 '현진헌'의 조카로 나오는 '미주'는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말을 안 하게 된 아이다. 미주의 발달 치료를 위해 베이커리 수업을 해주던 삼순은 미주를 보며 자신이 읽었던 소설 <모모> 속 주인공을 떠올린다. 모모를 모르는 미주에게 캐릭터를 설명해주던 삼순은 의도치 않게 실수를 하게 된다.


"모모는 집도 없고 엄마, 아빠도 없어. 아, 너 엄마 아빠 어디 계시니? 응?"


갑분싸 돼버린 분위기 속에 진헌은 묵직하게 "김삼순 씨" 한마디를 내뱉고, 자신의 잘못을 인지한 삼순은 표현을 바꿔 다시 말한다.


"모모는 집도 없고 할머니도 없고 삼촌도 없는 그런 불쌍한 아이야"


"근데 마을 사람들은 모모를 다 사랑한다? 왜냐면 모모는 귀 기울여 들어줄 줄 알거든. 모모는 말을 안 해. 말을 못 해서가 아니라 듣는 걸 아주 좋아해. 마을 사람들한테 고민거리가 있으면 다 들어주는 거야. 귀 기울여서. 응? 그게 중요한 거야. 귀 기울이는 거.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도 다 풀린 것처럼 기분 좋게 돌아가. 이 아줌마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 근데 내 말만 하는 어른이 돼버렸어. 지금처럼"

 

모모의 말 없음이 만든 '공백'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조차 제대로 모르겠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마음껏 꺼내놓았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꺼내놔야지만 그 본질을 제대로 알 수 있으니까. 모모 앞에 쏟아진 마을 사람들의 말은 계속 곱씹고 반추되며 문제의 본질로 인도됐을 것이다. 그 끝에 사람들은 모든 게 해결된 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 아닐까. 말에는 보통 가시도 있고 독도 섞여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꺼내서 들여다보기 전까진 제대로 알기 어렵다. 


윌리엄의 '혹쉬'는 어쩌면 말에 모모가 만드는 것과 같은 공백과 여유를 자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통 사회생활에서는 그처럼 상대를 배려하는 공백과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에 깊은 상처를 받았거나, 갈망을 느낀 사람들에게 어린 아이가 서툴게 발음하는 '혹쉬'는 그 자체만으로 힐링이 된 것이 아닐까?


말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혹쉬'와 같은 배려를 늘 염두에 두면 어떨까. 특히 말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만이라도 '혹쉬'와 같은 장치를 자신의 콘텐츠에 항시 내포시킨다면? 그렇다면 말에 상처받고 아파하는 경우는 줄어들지 않을까.


표현 방식뿐만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려는 태도 자체만으로도 '혹쉬'와 같은 기능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실이란 거대하고 복잡하며, 하나의 단편적 사실 조각만으로는 이르기 어려운만큼 함부러 예단하는 것도 막아줄 테니까. 그걸 계속 인지한 채 말이나 행동을 하다 보면 '단정'이 자아내는 날카로움에 애먼 사람이 베이는 일도 줄어들겠지. 현재처럼 쉽게 '말'이 유통되는 세상에선 윌리엄의 '혹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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