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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May 26. 2020

사람이라는 우주

그걸 전부 알 수 있을 거라는 오만

나는 어릴 때부터 적성 검사를 하면 항상 '봉사형'이 떴다. 추천 직업으로 간호사, 상담사 등이 떴는데,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남을 위하는 건 좋지만,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사는 건 재미없으니까.


가끔 사람들은 나를 보며 '종 잡을 수 없다'라고 한다. A 같은 애라고 생각했는데, B 같을 때도 있고, C 같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나도 그런 반응에 휩쓸려 정형화된 성격을 갖지 않은 '나'를 나도 알 수가 없어서 불안에 떨 때도 있었다. 일기에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라던가, '나도 날 잘 모르겠다'라고 자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냥 나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 나만의 '주관'이 확실했고, 그걸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는 인간이었으며, 그런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냥 놀랐을 뿐이고 이해하기 어려웠을 뿐이었던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종종 생활 속에서 서비스형 직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에게 인사를 받는다. 아파트를 나서면서 마주치는 경비원에게, 버스 운전사에게, 카페 직원에게 등등.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이게 별로 달갑지 않다. 왠지 그분들이 업무 범위를 넘어선 '감정 노동'을 하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것까지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감정 노동을 어떻게 손익 계산을 따져서 지불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전에 나는 일부러 그런 인사를 무시하곤 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저는 당신의 감정 노동을 바라지 않아요. 지금으로도 충분해요. 제발 저한테 인사하지 마세요.' 그때도 나는 남을 위하는 일을 좋아했고 추구하고 있었다.


지금은 생각을 바꿔서 인사를 건네시는 분들에게 나도 감사한 마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투명 사회'라는 개념을 알게 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 딴에는 '저한테는 안 그러셔도 돼요'라는 나름 긍정적 의도일지라도 그 의미가 상대에게 전달되기 힘들뿐더러, 나만 따로 구분하고 마음 편하게 인사를 안 하실 것도 아니실 테니까.



인간이란 그렇다. 모두 각자 자신만의 '심연'을 갖고 산다. 그게 단박에 설명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굳이 남들에게 이해받기도 어려운 일이기에 그냥 사회라는 공간에서는 '사회화'된 모습대로 살뿐이다. 그래서 모두 각자 대놓고 드러내진 않지만 나름의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따라 살아간다. 보통 그 기준이 전혀 다른 사람끼리 만나면 갈등의 스파크가 튀는데, 이것도 사실 한쪽에서 자신만의 기준을 '정상'처럼 주장하며 상대의 기준을 존중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이 역시 일단 '모르는 것'에는 공포부터 느끼도록 설계된 인간의 특징이기도 해서 마냥 비판하기도 어렵지만 무튼 상대의 심연은 생략한 채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 사람의 전부를 그럴 것이라고 판단해버리는 건 '자연스럽다'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부분은 아닌 것 같다.


봉사형 직업이 적성으로 나오고 남을 위한 일을 좋아하는 내가 봉사형 직업을 갖지 않는 건 '분수를 모르는 일'인 걸까? 또 '인권'을 중시한다면서 낮은 자리에서 일하시는 분들께 인사조차 건네지 않던 과거의 나는 '위선자'일까? 그 의도가 뭘지 알고. 내 안의 심연의 깊이가 어느 정도일지 알고.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장님 코끼리 말하듯'이란 말로 자주 표현되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코끼리처럼, 아니 그보다 더 크고 깊은 우주를 지닌 게 사람이다. 아직 우주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면서 단 몇 가지의 사실로, 행동으로 사람의 '모든 걸' 판단할 수 있을까. 1초 만에 상대 인상의 80%를 결정한다는 건 원시시대부터 생존 전략으로 우리 DNA에 새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누군가를 재단하고 판단하려는 일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가 된 이 시대에 그런 본능은 사회화의 한 과정처럼 다스려져야 할 부분이다. 그런 원시시대의 본능쯤은 상황에 따라 다룰 수 있어야 그나마 우리가 동물보다 낫다며 그들을 지배할 명분이라도 유지할 수 있지 않은가. 더 이상 식물과 동물에게 미안해지지 않으려면 '인간의 심연'과 '실제적 진실'에 항상 겸손하고, 불완전한 '나'에겐 항상 엄격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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