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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Oct 03. 2020

민주주의의 불편한 진실?

계몽 군주 논란으로 관찰하기

진실은 가끔 불편하다. 그리고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직면해야 하는 순간을 종종 맞이하곤 한다. 민주주의가 대표적이다. 모든 사람이 군주가 된다는 가슴 뛰는 이상을 품고 있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군중이라는 진실을 맞이하게 된다. 군중은 선동이 잘 된다. 우리나라의 굵직한 정치사의 뒤에 항상 뛰어난 선동가가 있었던 건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정치와 선동은 다르다. 경영학에 비유하자면 정치는 상품을 기획하고 생산해 마케팅까지 하는 거라면, 선동은 홍보만 한다. 선동가는 정치가가 정한 마케팅적 가치를 대중적 언어로 잘 풀어내 어필만 할 뿐, 해당 정치가 낳는 부작용의 책임에서는 자유롭다.(반면 이익은 함께 본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소비자가 홍보 내용은 참고만 하고 품평회에서 제품을 직접 테스트해보고 내 삶 속 가치를 가늠해 구매를 결정하는 일과 같다. 그런데 실제 민주주의가 이렇게 작동되고 있는가?


이번 계몽 군주 논란은 현재 민주주의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 중 하나라고 본다. 사석에서 ‘계몽’이란 단어가 나오면 여기에 반응하는 사람은 총 세 부류였다. 긍정적으로 보거나, 부정적으로 보거나, 모르거나. 모두 개념은 잘 안다. 하지만 그 단어에 담긴 맥락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앞에서 말한 모른다는 건 맥락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계몽의 맥락적 의미를 모른다. 그건 너무 당연하다. 맥락이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정치적이라는 건 나라를 운영하고 인재를 교육하는 식의 나라 운영 가치관과 유사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이러한 정치적 욕망이 없기에 가치관도 뚜렷하지 않다. 따라서 그 가치 중 하나인 계몽에 대해서도 개념만 알뿐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정치 고관여자들이 깊이 고민하고 토론해 나온 계몽의 맥락적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이유다.


포털 검색창에 이 단어가 오랫동안 올라와 있던 건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거라고 생각한다. 계몽이라는 뜻만 보면 자신이 평소에 알던 독재자의 이미지랑 어긋나는데, 나도 아는 그 뜻을 똑똑한 발화자가 모를 리가 없을 거고,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한 걸까 궁금한 것이다. 그래서 계속 검색을 해보며 사태를 관망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지 않고 관망한 건 발화자 때문이다. 만약 일반 정치인이 이 발언을 했다면 평소처럼 자신이 알던 상식에 비춰 쉽게 판단하고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발화자는 진보 진영의 뛰어난 선동가였다. 선동의 동력이었던 지적 능력에 대한 신임이 일반의 신중한 태도를 낳은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두 가지 민낯을 드러낸다. 첫째, 일반의 정치 철학에 대한 무지 혹은 무관심, 둘째, 선거로 뽑힌 국회의원, 대통령보다 선동가가 더 신뢰받는 현실이다.


선동가가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선동 정치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원칙과 어긋난다. ‘정치를 한다’는 건 개인의 뜻을 집단에게 관철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뜻이라는 건 오로지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선동가가 선동하는 정치도 선동가 개인의 이익과 결부된다. 물론 대의를 위한 것이라고 포장은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대의가 내 것과 같을 확률은 낮다. 선동가는 보통 뛰어난 능력과 배경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동가가 대변하는 집단 이익, 대의는 선동가를 빛나게 해주는 배경과 무관치 않다. 따라서 그의 대의는 평범한 배경을 가진 나를 포함한 일반 대중, 내 것과 같을 확률이 낮다. 그가 만들려는 나라가 그에게는 좋을 수 있지만 나에게는 좋을지 알 수 없다. 만약 나에게도 좋을 거라고 ‘확신’한다면 그건 우상화에 가까운 환상일 가능성이 높다. 환상을 깨려면 현실을 보면 된다. 선동가가 주창한 세상 속 나는 어떤가. 행복한가, 삶이 나아졌는가, 미래의 희망이 있는가 등등. 하지만 선동가의 강력한 영향력은 이러한 여러 개인의 이익을 대표해야할 민주 정치의 다양성을 약화시키고 이분법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평소 물건을 소비할 때 여러 홍보물을 비교 분석해 합리적으로 선택하려고 한다. 하지만 합리적 선택은 쉽지 않다. 해당 제품이 진입장벽이 높은 독과점 시장일 때 그렇고, 또 선택자인 우리가 이러한 구조를 바꿀 힘이 없을 때 그렇다. 그런데 정치 산업에서 후자는 다르다. 다만 선택자의 의지가 약하고 그 길이 험난하다.


선동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민주주의라고 없애야 한다는 건 아니다. 체제와 그 체제를 이용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체제는 잘못이 없다.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문제다. 앞으로의 시대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체제의 본질에 맞춰 제대로 이용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주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다. 여기에 소통은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소통에 강한 젊은 세대가 더 잘 풀어낼 거라고 믿는다. 정치가 젊어져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추가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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