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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Jan 06. 2021

미안해만 하고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을 정인이

그리고 이낙연의 사면론

<그것이 알고싶다>의 힘이 대단하다. 예전에 잠깐 소비되고 말았던 16개월 입양아 정인이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분노하도록 했다. 아동 학대 뉴스는 예전부터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대중과 제작진은 학대의 구조적 원인보단 자극적인 개인의 사례에만 주목하고, 그것만 제대로 처벌 받으면 모든 게 끝날 것처럼 군다. 악마가 된 정인이 양부모들은 앞으로 엄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디선가 고통 받고 있을 제2, 제3의 정인이들은 여전히 똑같이 혹은 그보다 더 잔인하게 죽어나갈 가능성도 높다.


아동학대 문제는 부모 개인의 악마성만 단속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 해결보단 정인이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던 <그것이 알고싶다>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우리가 모두 정인이에게 미안해하지만, 만약 미안해하는 걸로 정인이가 살아 돌아온들 그 다음을 누가 나서서 책임질까. 국가가 해야 한다고?

KBS1TV <시사직격> 38회에서 나온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정인이같은 아이를 살리려면 결국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대놓고 예산 부족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저 대안들의 실현가능성을 따져볼 때 정인이를 학대 부모로부터 구제해도 정인이를 돌볼 사람, 보호할 시설, 교육 등 만만치 않은 비용이 예상된다. 하지만 정인이같은 아이를 살리자고 복지 예산을 확대편성하면 포퓰리즘이라 욕할 것이다. 정인이같은 아이 잘 돌보라고 아동보호센터 인력 처우를 개선하면 민간 유아교육계가 사업 수익이 약화된다고, 돌봄 서비스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인력 처우가 과하게 좋다며 들고 일어날 것이다. 정인이 문제는 결국 국가의 재분배와 연결된다. 


이 세상 모든 아동은 필연적으로 가정의 울타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치열해진 인력 시장 속 적체된 노동 수익, 천정부지로 솟는 부동산 가격, 무엇을 입고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계급과 차별 문화 속에 평범한 가정은 파편화된다. 최근 통계청은 1인 가구 숫자가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아동학대 가정에서 자주 목격되는 쓰레기 동산

파편화된 가정 속에 불안한 성인은 아동에게 안정적인 정서적 보살핌을 주지 못한다. 그 부담을 낮추는 정책이 국가의 역할이겠지만 돌봄 서비스는 한계가 있다. 마치 코로나19 감염자가 많아 병원에 음압 병상이 꽉 차고 대기 환자가 넘치는 현상과 같다. 따라서 아동학대 문제는 수많은 가정이 해체되어 가고, 그 외부효과를 국가가 감당하기 버거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우리 사회의 비상 신호이지, 단순히 어떤 기관이나 사람이 관리감독을 잘한다고 벌어지지 않을 일이 아니다. 그렇게 구제되어도 가정을 잃은 아동은 갈 곳이 없다.


양육비 때문에 친척들의 돌봄조차 부담스러워 하는 아동학대 생존자


정인이 사건과 이낙연 민주당대표의 사면론이 관계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정치 때문이다. 재분배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는 정치다. 그런데 정치가 쓸데없는 이념의 양극단에 휘둘리다 보니 정인이같은 위기에 처한 아동 문제에 국가가 총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연약한 개인은 내 손익부터 따지며 정인이같은 아동 문제를 방관할 수밖에 없다. 또한 계속되는 사건사고에 정부의 재분배와 관리의 신뢰가 떨어지니 개인은 정부가 내놓는 이런 저런 정책을 신뢰하지 못하고 여전히 각자도생으로 일관한다. 그러면 정부는 각자도생하는 대중을 힘으로 제어하는 강경책을 고수한다. 불신의 악순환 속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약자는 계속 힘들고 정치는 계속 진영논리에서만 맴돈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 고관여층은 재작년 광화문과 서초동 두 세력으로 드러났다. 최근까지 민주당의 토대는 서초동 집회 세력이었다. 그러나 자신들만이 정의라며 반대 진영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주적’으로 몰아가는 이들의 오만함에 중도층이 점점 등을 돌리고 있다. 그러자 이낙연 대표가 이들이 절대 타협할 수 없지만 반대쪽의 광화문 집회 세력이 무조건 환영할 전직 대통령 사면 카드를 꺼냈다. 거론 배경은 크게 3가지로 보인다.

첫째, 상대편 제거에만 몰두한 당내 강경 세력에 대한 자제의 메시지.

둘째, 그럼에도 계속 나댄다면 앞으로 새로운 정치 토대를 찾겠다는 경고의 메시지.

셋째, 이 일에 이낙연 자신이 선봉에 서겠다는 의지의 메시지이다.


야당의 불편한 기색은 아마도 둘째, 셋째 배경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 정치가 이 두 양극단의 토대 없인 제대로 일어설 수조차 없다는 점이다. 정치 리더가 되려면 둘 중 하나를 토대로 중도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결국 정치의 시간 중 8할은 이들의 정치 효능감인 상대편 타도를 하는 데 소모된다. 그동안 정인이와 관련된 민생 문제는 또 차치되어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선심성 예산 혹은 누군가의 인류애에만 기대며 지옥문 경계에서 생과 사의 운명을 오갈 것이다.


지금 정치 논쟁을 보니 떠오르는 역사가 있다. 1680년, 숙종은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을 등용한다. 왕이 되자마자 서인의 영수를 유배 보냈던 숙종은 서인과는 다른 남인의 모습이 기대했을 것이다. 자신의 기대에 못 미쳤던 남인이지만, 9년 후 숙종은 이들을 다시 등용한다. 늘 야당 신세였던 남인의 패배의식과 당시 왕비를 앞세워 신권을 강화했던 정치 형태 등을 감안해 한번 더 기회를 준 듯하다. 실제로 숙종은 남인 배경의 장희빈을 왕비에 세우고 그들의 친인척들을 정승에 앉혀 힘을 실어줬다. 그럼에도 남인은 숙종의 기대에 못 미쳤고 결국 갑술환국으로 남인의 정치 생명은 끝난다.


정치는 세력 싸움이다. 숙종이야 사대부말곤 대안이 없으니 서인과 남인 사이를 오갔겠지만 현재는 다양한 힘이 존재하기에 그때와는 좀 다를 수 있지 않나. 정치는 말과 원칙과 명분으로 싸우는 전쟁이다. 현재 태극기 집회 세력도 서초동 집회 세력도 이들 지도자의 승리말고는 어떤 명분도 없다. 팬덤 정치의 폐해다. 이외에 민생을 위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을 구축할 순 없나. 그 구심점을 만드는 게 곧 직업 정치인의 능력 아닌가. 가령 부동산세금을 미래 국가의 근간인 아동 복지에 쓴다든지, 혹은 법인 세금을 미래 노동 자본 재교육을 위한 실업 급여로 쓴다든지, 이런식의 적극적인 명분 정치가 행해진다면, 국민도 국가의 재분배 정책에 신뢰를 갖고 국가라는 울타리를 믿고 안정된 마음으로 아동과 같은 약자를 괴롭히지 않고 돌보려는 마음이 앞서지 않을까?

어느 부모가 자식을 괴롭히며 좋아하고 싶을까. 결국 부모도 병들었기 때문이다


부모도 연약한 한 인간이다

이게 실현가능한 소리인지 확신은 없다. 하지만 문제의 진짜 원인은 직시해야 한다. 정인이 문제는 재분배의 정치가 근본 해결책이고, 이러한 논의를 가로막는 것은 물론 스타 정치인과 그 이해관계자들의 승리 외에 남을 것 없는 팬덤 정치는 끝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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