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퀴즈 유해진님 편. 이 짧은 클립 안에 소위 꼰대의 전형이 그대로 담겨 있다. 나이가 들수록 남의 이야기를 잘 안 듣고 내 이야기를 하려 한다, '안다니까 네 마음' '내 얘기를 들어봐' 등등등
사람이 점점 보수화되듯 이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변화다. 타고난 천성에 경험이 하나 둘 더해질수록 신념과 주관이 뚜렷해지고, 그러는 만큼 개인의 세계는 확고해지면서 동시에 편협해진다. 이 흐름에 의식적으로 저항을 하는지 여부가 그 사람의 유연성을, 어쩌면 결국에는 생명력까지도 좌우할 것이다. 이걸 떠올리면 나이가 들수록 귀를 활짝 열고 중용을 견지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겠다는 각성과 그게 참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함께 하게 된다. 그러나 강 건너의 일이 아니다. 10-20년 뒤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내겐 종교가 그런 영역이다.
평생 무교로 살았지만, 종교와 관련된 경험은 으레 그렇듯 자연스레 했다. 초등학교 시절 월정사에서 일주일 정도? 템플스테이를 한 적도 있고(너무 좋아서,이때 염주도 사 오고 한동안 불교에 빠졌다) 친구 따라 기독교 여름캠프에도 다녀왔다. 평준화로 배정된 중학교가 천주교 학교였던 탓에 개학 방학 졸업 각 시기마다 미사가 있었고 부활절 땐 학교를 안 갔다(굿 !). 그러나 그래 봐야 다 얕은 수준. 종교의 의미를 생각해본 건 군대에서였다.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육군훈련소 내 종교행사 참석 강제에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는데, 말인즉 라떼는 훈련소 6주 내내 종교행사를 선택해 참가해야 했다. 훈련병 시절이니 종교는 초코파이 정도의 의미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생겨서 세 종교를 두 번씩 경험하는 사이 자연스레 의문을 품었던 것 같다. 문화적으로 친숙해서인지 불교는 좀 덜했고 예배와 미사를 드릴 때 주로 그랬다.
여기서 잠깐. 만약 내가 종교인이라면 경우에 따라 무신론자의 발언이 불편할 수 있을 것 같아 종교 이야기를 하기가 참 조심스러운데, 너른 마음으로 다양성을 품어주리라 기대하며 말하자면. 나에겐 예배당과 성당의 공기가 부자연스러웠다. 성경이라는 실체 없는 신화, 인간이 만들어낸 신, 모든 것을 주님과 엮는 사고방식과 찬송가.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인간이 너무도 이성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세계를 보고 문제에 접근한다고 느꼈다. 그때 인간에게 종교는 무슨 의미인가? 라는 꽤 큰 화두가 생겼고, 지금도 종종 우연한 계기로 상기하면 꽤 흥미로운 생각거리가 되곤 한다.
인간은 동물이다. 자연계에서 독특하게도 매우 고도로 진화한 하나의 종. 가깝게는 태풍만 겪어도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되는데, 이것도 사실 오만이다. 태풍에게 인격이 있어 '머리 좀 쓴다고 착각하나 본데, 언제 인간이 자연 위에 있었던 적이 있더냐?' 해도 할 말은 없다(물론 지금 그러는 덕에 유례없는 기후위기에 떨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나약하다. 나약한데 머리는 좋은 인간이 택한 방법이 종교, 적어도 원시종교는 이랬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막상 말을 하려 하니 종교에 대한 지식이 참 부족해서 말문이 막힌다. 원래는 꼰대에 대해 써봐야지 했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왔네. 종교 기원까지 찾아보다 지금 뭐 하고 있나, 논문 쓰는 것도 아니고 싶어 잇는다.
인간은 죽는다. 이 불변의 명제는 모든 인간에게 불안과 두려움일 것이다. 예수님 믿고 천국 가세요. 사후 세계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사후 세계를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으로 구분해 상정하고 그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포교한다. 그리고 배타적이다. 믿어야만 천국에 간다니, 치사하게 이게 뭐람?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아내며 자연의 섭리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뭇 동물과 달리 존재에 대한 고차원적 사유를 할 수 있다는 저주받은 축복을 누리는 인간은, 이런 식으로 일부의 경우 무화의 두려움에 대한 위안을 종교에서 찾는다. 군대에 있을 땐 이런 접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하느님께 감사하거나 혹은 시험에 들게 하시는 것이라 생각하는 접근도 그랬다. 왜 이렇게 의존적이지? 죽음을 끝까지 신화화하며 천국으로 도피하기보단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게 더 존엄하고 이성적인 게 아닌가, 만사 초월적인 존재와 연관지어 생각할 게 아니라 스스로 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나약하고 불완전하다는 점에서 종교에서 위안을 삼을 수도 있지, 싶으면서도 그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지난주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읽을 때 엄청 공감이 됐다. 니체는 참 신랄하게도 비판을 했더라고.
꼰대에서 긴긴 종교 이야기로 넘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도 그 방식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그런데 공감하지 않는 걸 넘어 약간의 거리감을 느끼는 듯한 스스로의 모습에 경각심을 느꼈다. 신념의 양면성, 개인의 세계를 뚜렷하게 하는 동시에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를 어렵게 할 수도 있는 그 신념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심리적 장벽을 공고히 세우고 배타적으로 대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일말의 감정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꼰대! 나름의 경험 데이터가 있다 해도 종교나 기독교에 대해 정말 깊이 아는 것도 아닌데.
종교는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고작 반오십 사는 동안에도 반복과 고착화를 거쳐 꼰대가 될 수 있는 영역이 생기는데 하물며 100세 인생은 오죽할까. 더욱이 앞으로는 지금까지와 비길 수 없을 정도의 급진적인 변화들을 일상으로 겪을 텐데. 적응하고 방법을 찾으며 이래저래 또 살아가겠지만 삶의 어떤 영역에서든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말고, 한갓 한 인생 치 경험지식에 갇히지 않고 겸손하고 유연하게 살아가려는 자세를 잘 지켜야 할 것 같다.
유튜브 숏츠 내리다가 유재석님이 냅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남의 얘기를 잘 안 들어요' 라 하시는 걸 들으며, 문득 써보고 싶었다. 안 그래도 최근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어서 더 귀에 들어왔다. 지금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게 너무 재미있는데, 이것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무지의 영역이 많아 그런 것일 뿐인가, 그렇담 나중에는 나도 귀를 닫게 될까 싶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종교 이야기를 한참 하게 됐네. 꼰대 시리즈로 하나 더 써봐야겠다.
기독교에 비판적으로 썼지만 훈련소 수료하고 자대 편입 후에는 자발적으로도 교회를 종종 찾았다. 빵 혹은 가끔 나오는 싸이버거의 은혜와 함께 목사님 설교를 좋아했다. 한국 기독교에 비판적인 이야기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해주기도 하셨고 특정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풀어내는 이야기가 남기는 여운이 있었다. 생각해볼 지점들이 있어 의외의 인사이트들을 얻게 되곤 했다. 찬송가는 그때도 부르지 않았으나 꽤 좋은 시간으로 기억한다.
호기심을 자극해 글을 쓰게 됐지만, 이 사담이 읽는 당신에게 한 번쯤 신념의 양면성과 마음속 있을지 모를 꼰대 기질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기를. 유연하게 살아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