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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Feb 01. 2020

'자식'이라는 영원한 사랑

아이는 사랑, 그 자체

남편과 한창 연애할 때, 나는 '이 사람과는 평생 함께 살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혼까지 결심했다. 열정적인 이끌림만 존재하는 사랑이 아니라,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즐거워지는, 친구처럼 가치관이 잘 맞고 신뢰와 존중이 밑바탕에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보니... '영원한 사랑'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미안하지만 남편이 아니었다. (남편은 영원한 사랑이라기보단 동반자..?) 그것은 바로... 아이에 대한 사랑이었다.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영원한 사랑'이 아닐까 싶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다시 태어나는 기분일 정도로, 아이의 존재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인생을 선사한다.


이건 너무나 깊은 사랑, 그 자체이다. 세상에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이렇게 마음 깊이 사랑할 수 있을까? 내 아이보다 더 중요하거나,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또 있을까?


결혼 전 한창 연애할 때,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있을 때에도,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많이 노력하는 편이었다. 가슴 속은 사랑으로 휘몰아쳐도, 일상은 열심히 살아야 하니까.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 하니까. 나중에 이 사랑이 깨졌을 때의 여파가 두렵기도 했고, 너무 사랑이란 감정에 휩쓸려 스스로 상처받을까봐 두려워했다.


남녀간의 사랑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사랑'이란 감정만을 놓고 보았을 때, 아이에 대한 사랑은 정말 맹목적이다. 주저함이나 망설임같은 것은 없다. 더 주지 못해 안타깝고, 매일 매일 너무나 빨리 커서 아쉬울 뿐이다.


아이가 이렇게 예쁜 시절을 함께 할 수 있음에 너무나 감사할 뿐이다. 아이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이 내게 가장 큰 축복이다. 늘 곁에 붙어있는데도, 하루 하루가 아쉽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내 아이.


사실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이나 쓰고 싶었는데, 솔직히 잘 써지지가 않았다. 썼다 지웠다를 계속  반복했다. 이성적으로 쓰기가 무척 힘들었다. 맹목적인 러브레터, 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ㅎㅎ 그래도 한번쯤은 아이에 대한 지금의 이 마음을 꼭 글로 남겨두고 싶었다.


예전에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외국인 보스가, 농담처럼 나에게 이런 얘길 했었다. 니나씨는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 결혼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그의 통찰력에 깜짝 놀랐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서,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때도 아이만은 꼭 낳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아이를 좋아하던 나였는데도... 육아는 정말이지 '헬'이었다. 아이를 그냥 '예뻐하는 것'과 직접 '육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얘기라는 것을 나 역시 전혀 몰랐던 것이다.


지옥같이 길고 힘든 육아의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늘 다정하고 평화롭게 지내던 우리 부부는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싸움의 이유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잠을 계속 못 자고, 한없이 지쳤던 것만 기억이 난다. 제대로 된 대화도 할 여유가 없었다. 건장한 체격과 단단한 체력을 가진 남편도, 육아 앞에서는 금방 나가 떨어졌다. 주말에 하루 정도 아이를 맡기고 외출하고 돌아오면, 너무 지쳐서 눈빛에 생기를 잃은 남편이, 난장판이 된 집안을 배경으로 좀비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ㅎㅎ


아이가 4살 정도 되고 나니, 이제서야 좀 여유가 생긴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란다. 오늘은 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한참 그림을 그리면서 눈도 떼지 않고 갑자기, "엄마 사랑해," 라고 툭 내뱉는다. 한번 더 듣고 싶어서, "방금 뭐라고 했어?" 라고 다섯 번쯤 물어봤는데, 딴 소리만 한다. ㅎㅎ


아침에 일어날 때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일어나는 아이. 음악이 나오면 벌떡 일어나서 신나게 춤을 추는 아이. 중장비와 자동차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아이. 낡고 너덜해진 애착이불을 아직도 늘 가지고 다니며 냄새를 맡는 아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내 아이.


아이가 좋아하는 중장비 트럭이나 자동차 장난감을 사서 집에 들어가는 날이면, 나는 거의 뛸듯이 걷는다. 이걸 보고 좋아할 아이의 얼굴을 1초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가슴이 설렌다. 또 수시로 아이의 머리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냄새 맡는 것을 좋아한다. 땀과 체취가 섞인 그 달큰하고 꼬순 냄새를 맡을 때, 아이의 따뜻하고 축축한 손을 잡고, 부드러운 이마를 손으로 쓸어넘길 때, 볼록 나온 배와 통통한 허벅지를 바라볼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아이는 매일 자라는 것 같다. 단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다. 어쩌다가 내가 아프고 몸살이 나면, 아이는 기가 막히게 알고 떼도 쓰지 않는다. 자기 엉덩이를 누워있는 엄마 등에 꼭 붙인 채, 혼자 자동차를 가지고 잘 논다. 그러다 지루하면 그림책을 넘겨보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 조그만 손으로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한다. 내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것처럼.


내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아이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내가 놀아주고 있는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이미 스스로 놀 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아이가 그 무궁무진한 상상력으로 나와 '놀아주는' 것에 가깝다. 서로를 의지하고, 함께 온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 멋지고 행복한 시절이, 하루 하루가 너무 소중하다.


언젠가 아이가 내 품을 서서히 떠나게 될 거라는걸 알면서도, 주변의 선배 맘들에게 자주 묻곤 한다. '아이가 언제까지 뽀뽀해주나요? 아이가 언제까지 손잡고 다니나요? 아이가 언제까지 부모와 놀아주나요?.... '


아버지는 이런 나에게,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나이에 맞는 즐거움과 행복이 다 있다고. 자식은 평생동안 행복과 괴로움을 함께 안겨주니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자식 앞에서 부모는 언제나 슈퍼 '을'의 존재인 것 같다. 아니, 아이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세상 앞에서 '을'이 될 수 밖에 없다. 너무 소중한 것, 지켜야할 존재를 가진 사람은 매사에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 혹시나 내 아이에게 해가 될까봐, 조금이라도 나의 행동과 말로 인한 업이 아이에게 갈까봐, 말 하나, 행동 하나도 조심하게 되었고, 건강관리에도 더욱 신경쓰게 된다. 오래 오래 건강한 부모로, 아이 뒤에 든든하게 있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어렸을 때와는 달리, 말도 하기 전부터 마스크 쓰는 법부터 가르쳐야 하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왜 나가서 뛰어놀면 안되냐고, 왜 키즈카페도 가지 못하냐고 묻는 아이에게, 미세먼지와 신종 바이러스 이야기를 열심히 설명하는 내 목소리가 참 공허하다. 아이는 정확한 말뜻을 이해하진 못해도, 어쨌든 위험하고 안된다는 뉘앙스는 파악했는지 더 이상 묻지는 않는다.  


아이를 키우기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존재 자체로 축복이다. 내 아이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다. 한때 아이였던 우리들도 모두 그런 축복을 받으며 어른이 되었다.


가끔 아이를 보며 고민에 잠긴다. 어떻게 키워야 할까? 사실 답은 그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 속에 다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불안하니까 인터넷을 뒤지고 책을 펼쳐보고 강의도 듣는다. 그런 자료들의 도움도 물론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 그 자체인 것 같다.


대학원 학기 중에는 잘 몰랐는데 방학이 되어 아이와 오랜 시간 함께 있다보니, 마치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지직거리며 조금씩 서로에게 맞춰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도 하나의 엄연한 인격체이자 '타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사실 아이를 처음 훈육할 때 마음이 좀 힘들었다. 대학원 공부한다고 바빠서 할머니 손에서 크는 동안, 아이는 조금 떼가 늘은 것 같았다. 화가 나면 목이 쉴 정도로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장난감을 집어던지곤 했다. 버릇없이 클까봐 조금 엄하게 훈육했는데,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막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방학인 덕분에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서서히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는 할머니 손에 컸다고 버릇이 없고 떼가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엄마를 원망하고, 사랑하고 있는 마음의 표현이었을 뿐이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데, 엄마는 새벽에 나가서 밤에 들어오니 속상하고, 원망스러운 감정을, 떼쓰고 우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 뿐이었다. (이걸 쓰는 지금도 가슴이 찢어진다...ㅠㅠ)


엄마와 붙어있게 된 아이는 세상 행복하고 밝고 천사같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빨래를 개고 있으면 어느새 뒤에서 다가와 목을 감으며 와락 안긴다. 화장실에 가면 저~기서부터 다다다다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옆에 다가와 좋아하는 자동차를 부엌에 올려두고 간다. 딱히 뭘 해달라고 울고 떼쓰는 일도 거의 없다. 조곤조곤 말로 해주면, 조금씩 알아듣고 받아들일건 받아들인다. 그저 엄마와 함께 있고 싶은 순수한 아이의 마음을, 왜 나는 제대로 바라보질 못했던 걸까.


내가 이 아이에게 너무나 깊은 사랑을, 일방적으로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더 크고 순수한 사랑을, 아이에게서 받고 있었다.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감정의 깊이. 또 다른 세상. 우리를 수없이 웃게 하고, 울게 만드는 너. 우리를 극도의 행복에도, 불행에도 몰아넣을 수 있는 이 조그만 아이. 부디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로 자라다오.... 엄마 아빠가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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