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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Jul 14. 2019

외국계 회사 비서직에 대하여

'비서'가 갖는 이미지와 실제 업무와의 간극

나는 10년 동안 두 군데의 외국계 회사를 다녔다. 직무는 비서였는데, 사실 나는 내가 비서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비서직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함부로 단정지어 상상하는 그 '이미지'가 싫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받는 질문들이 너무 지겹기 때문에 일일이 반박도 하지 않는다. 내가 10년간 일해본 비서라는 자리는 참 어렵고 바쁜 자리였다. TV에 나오는 단정한 옷차림에 완벽한 메이크업, 날씬하고 예쁜 외모로 커피를 타는,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얘기다. 차라리 단호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무장된, 말수가 적고 무표정하고 냉정한 이미지에 더 가깝다. 미친듯이 바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다. 보스들은 모두 바쁘고 성미가 급하기 때문에, 항상 결론부터 짧고 간략하게 보고해야 한다. 보스의 일을 모든 면에서 써포트하는 것은 기본이고, 중견 기업의 경우 회사 HR 업무, 대기업의 경우 부서의 HR 업무도 맡게 된다. 그리고 지사,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도 담당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보스의 '대리인'으로서,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한다. 여기서 커뮤니케이션이란, 보스의 상사, 부하직원, 부서장, 부서원, 유관 부서, 해외 지사, 본사, 외부 고객사 등등 보스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과의 일정을 조율하고 미팅을 잡고 관련 일들을 모두 Follow-up 해야 한다. 중간 중간 비용을 처리하거나 잡다한 사무 처리 업무도 있지만, 큰 줄기는 보스의 일정 관리와 커뮤니케이션이다. 그 와중에 외부에는 일일이 밝힐 수 없는 confidential 한 모든 일들을 함구한 채, 아침부터 보스를 만나고자, 또는 필요한 정보(?)를 알아내고자 출근 전부터 나에게 전화하고 비서실을 찾아오는 부서장들, 팀장들, 직원들을 돌려보내거나 잘 다독여(?) 다른 일정을 잡는 일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이다.


비서로서 '중도'를 취하는 입장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웠는데, 너무 모든 것을 원칙대로 처리하며 직원들과 거리를 두어도, 자칫 잘못하면 '지가 사장인줄 알아' 라는 소릴 듣거나, 그렇다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친화력있는 모습을 너무 보여도, '비서가 아주 가볍네'라는 소릴 듣기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적당히' 무거우면서도 친절하면서도 거리를 둘 줄 아는, 소위 '센스'가 필요하다. 신입 시절에는 이 강약 조절이 잘 안되어 너무 도도하고 거만하게 구는 비서들도 많이 보았고, 반대로 너무 굽신거리는 비서도 보았다.


그리고 보스의 역할도 엄청나게 중요하다. 즉, 보스와 비서의 합이 잘 맞는 경우 정말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로 오래오래 같이 근무하게 된다. 내 경험상 비서를 많이 고용해본 보스의 경우, 대부분 비서를 잘 '활용할 줄' 아는 분들이 많아서 같이 일하기가 편했다. 또 이런 분들은 비서의 역량을 금방 파악하기 때문에, 업무 분장이 확실하고, 피드백도 빠르며, 그에 따른 지시도 명확했다. 그러나 비서를 처음 고용하는 보스의 경우, 어디까지가 비서의 업무인지, 어떻게 일을 시켜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과도기의 시간을 거친다. 일을 남에게 시키는 것이 때로는 더 성가신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비서의 일을 통칭해서 설명하기가 힘든 이유가, 업종이나 회사 특성에 따라, 또는 보스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모든 비서가 이렇다고 설명하기는 힘들다. 다른 직무도 마찬가지겠지만 비서직은 더욱 그렇다. 어떤 곳의 비서는 '의전'이 주 업무인 경우도 있고, 어떤 곳은 HR 업무를 거의 팀장급처럼 메인으로 하는 경우도 보았다. 외국계 기업의 경우는 나처럼 보스의 커뮤니케이션이나 일정 조율, 회의와 자료 준비 등 업무 써포트를 주로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영어는 당연히 잘해야 하고, 각종 업무를 신속히 처리하기 위한 복잡한 메뉴얼에 익숙해져야 한다. 귀찮고 시간 오래 걸리는 일을 대신 하라고 비서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보스가 하는 모든 일을 잘 파악하여, 보스가 요구하기 전에 한발 앞서 미리 완벽하게 준비해놓고, 보스가 혹시 빠뜨릴 수 있는 일들까지 미리 준비해놓는 그림자 같은 역할이다. 그러다보니 회사도 보스의 눈으로 보게 되고, 모든 직원들도 보스의 눈으로 보게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지가 사장인줄 알아' 라는 소릴 들어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10년 동안 비서직으로 근무했지만, 그리고 인사 평가도 좋게 받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비서로서 뿐만 아니라, '회사원'으로서는 애초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10년을 회사원으로 지낸 것은, 그냥 이것을 '직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꿈이 따로 있었고, 꼭 직업과 꿈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직업을 나름 좋아했다. 사랑까진 아니더라도, 좋아하며 일했었다. 이 일을 통해 자아를 찾겠다던지, 나를 증명하겠다던지, 그런 것은 없었다. 나는 매달 따박따박 나오는 내 월급을 사랑했고,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살 수 있는 내 생활이 좋았기 때문에 회사를 다닌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런 마음가짐이었기 때문에, 즉 큰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별로 실망하거나 지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이 회사에서 승진해서 임원이 될 계획도, 욕심도 없었고, 그저 몇년 다니다가 일찍 은퇴하여 내 꿈을 쫓아갈 생각이 있는 나에게, 사내 정치나 영업 실적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회사생활을 하면서 가장 싫었던 순간이, 거의 1년에 한 두번은 있는 부서 워크샵 같은 행사였다. 애초에 단체로 으쌰으쌰하는 것을 질색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비서를 선택한 것이었다. 팀으로 일하기가 싫었기 때문에, 그나마 단독으로 일할 수 있는 비서직을 선택했고, 그 덕분에 10년은 잘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워크샵을 피할 순 없었다. 항상 억지로 갔었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부터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캠프, 같은 것들이 나는 너무 싫었다.


그 싫은 내색이 겉으로 안 났을 리가 없다. 가까운 부서의 중간급 팀장은 그런 나를 특히 싫어했다. '쟤는 뭔데 부서의 단합에 동참하지 않고, 자기 업무 이외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냐'는 것이 미운 털이 박히게 된 요지였다. 공감이 갔다. 나 같아도 그런 직원이 있으면 예쁘게 보이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 팀장은 내 직속상사도 아니었을 뿐더러, 심지어 같은 부서도 아니었다. 같은 부서처럼 보이는 아주 긴밀한 유관 부서였기 때문에, 그 팀장은 내가 더 싫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쉬운 것은 그 팀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팀장의 부서가 하는 일을 이미 보스를 통해 모두 알고 있었고, 내가 먼저 그 팀장에게 부탁을 하거나 업무를 요청할 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 팀장은 항상 내게 요청을 해야할 입장이었다. 모든 일에 보스의 컨펌이 필요했기 때문에, 항상 나에게 스케줄을 물어보고 회의를 잡아달라고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쉬운 소리를 해야하는 입장에서 그것이 권력으로 보였을 것이다.


내가 조금만 융통성이 있었더라면, 아니 회사에 조금만 미련이 있었더라면, 나는 그 팀장과도 잘 지내보려고 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회사에 월급 이외에는 아쉽지가 않은 사람이었고, 안타깝게도 그 팀장은 내 월급에 영향을 미칠 결정권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랬더니 더 난리를 치며 나를 싫어했는데, 한번은 모든 임원들 방을 찾아다니며 내가 자신에게 저지른 '만행'(자신만의 생각)을 일일이 고자질하기에 이르렀다. 임원들은 대부분 '강 건너 불구경'같은 입장이거나, '바빠죽겠는데 왜 저러지' 같은 입장이었을 뿐, 아무도 그 팀장에게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평소의 내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임원들이 더 잘 알고 있었고, '뒷담화'를 하는 사람의 말에 신뢰가 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위 얘기는 내가 퇴사한 후에 전해들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런 '쿨한' 태도가 비서로서 오래 근무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비서라는 업무의 특성상, 너무 야심이 있어도 참 괴로운 자리가 된다. 야심가가 '그림자' 역할에 만족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내 정치에 관심이 많거나, 남의 평가나 지적질에 예민해도, 또는 이상한 오해를 받는다고 쉽게 속상해하는 성격도, 비서로서 오래 일하기는 힘든 것 같다. 그런 일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일단 보스와의 관계에서 업무적인 신뢰감이 착실히 쌓인 이후라면, 다른 부수적인 일들 - 모함이나 사내정치나 구설수 등 -은 그렇게 많이 신경쓸 필요가 없다. 솔직히 시간이 아깝다. 그냥 꼿꼿하게 나의 길을 가면 된다. 어차피 외로운 자리이기도 하고, 잘하는 것은 기본, 못할 때에만 티가 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직무가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면 그럴 것이다.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플러스 알파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 돈 버는 일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 쉬워보이는 일도 내가 직접 해보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들이 나름대로 산재해있다. 회사생활, 그것도 비서직으로 10년 근무 후에 얻은 것이 있다면, 이같은 겸손함일 것이다. 모든 생업(돈버는 일)은 각각 소중하고, 나름대로의 어려움과 전문성이 있으며, 어떤 일도 쉽게 판단하고 단정지어 말해서는 안된다는 겸손함이다. 스스로 정당하게 일해서 돈을 버는 일은, 그 과정이 아무리 구차하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도움일 것이고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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