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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Jul 21. 2019

30대 - 첫 독립, 그리고 불금(!)의 추억들

마흔을 앞두고 떠올려보는 30대 싱글 시절

지금으로부터 9년 전, 그러니까 딱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3년간 다니던 회사를 떠나 새로운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고, 부모님께서 서울을 떠나 경기도권으로 이사를 가시게 되었으며,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독립'이란걸 하게 되었다. 회사는 강남, 부모님 집에서 출퇴근하려면 3시간 넘는 시간을 길에 버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운전을 한다고 해도 출퇴근 시간의 그 교통 지옥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사실 부모님께서 이사를 알아보실 시점부터 나는 속으로 이미 결정을 했다. 드디어 독립하는구나! Wow!


서른 살 겨울에 독립하여 결혼하기 전까지, 6년 동안의 싱글 생활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그 6년 동안의 시간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오롯이 내 힘으로, 나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누려본 유일한 시간이었다. 경제적인 독립은 20대부터 했기 때문에, 부모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도 나는 '독립적인' 성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경제적인 독립은 기본이고, 물리적으로도 떨어져 있어야 정신적으로도 진짜 독립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밤에 혼자 자는 것이 무섭고, 퇴근해서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오는 것이 허전했다. 하지만 1년도 채 안되어 혼자인 시간을 완전하게 즐기게 되었다. 가끔 명절 때 부모님 댁에 가도, 가족들을 보는 것은 물론 좋았지만 얼른 '내 집'에 돌아가서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독립을 하면 친구들도 자주 초대하고, 음식도 자주 해먹고, 밖에서 실컷 놀다가 새벽에 들어오고, 외박도 맘껏 하고 그럴것 같지만.... (20대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의외로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유지하게 된다. 시간 날 때 몰아서 빨래나 청소도 해야 하고, 세탁소에 옷도 맡겨야 하고, 장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규칙적으로 운동도 하러 가야하고, 동네 단골 밥집이나 술집에도 가야 하고...(?) 여러가지로 아주 분주했다.


혼자 살면서 가장 힘들 때는 역시 아플 때이다. 몇번 크게 아파서 끙끙 앓아본 이후, 개인 PT를 끊어서 운동을 시작했고, 밥도 집에서 직접 해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실, 운동은 그냥 하면 되는데 왜 그 비싼 돈을 주며 하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운동은 그냥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건강 관리 뿐만이 아니라 멘탈 관리를 위해, 기분 전환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일이 너무 힘들 때,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심할 때, 다 그만두고 땅 속으로 꺼지고 싶을 정도로 우울하고 무기력해질 때,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고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 비싼 돈을 주고 PT를 받았다.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트레이너가 격렬한 운동을 시키며 "한 번만 더~ 할 수 있어요! 좀만 더 힘내서~~~ 그렇지, 잘했어요!" 라고 격려해줄 때마다, 어린애처럼 힘이 솟았다. 그렇게 땀을 흘리고 나면 기분도 한결 나아지곤 했고, 체력도 점점 좋아졌다.


이때는 소개팅도 마치 업무를 하듯, 이상한 초조감과 의무감에 휩싸여 쉴새없이 하던 때였는데, 가끔은 너무 지치고 힘들었다. 소개팅 따위가 뭐가 힘들고 지칠 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주말마다 똑같은 원피스를 입고 나가, 똑같은 메뉴를 먹으며, 똑같은 질문들과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나, 싶은 자괴감 같은 것이 밀려올 때가 있었다. 그러면 소개팅을 안한다고 하면 될 터인데, '혹시 이번에는..?' 하는 망할 희망고문 때문에 소개팅을 쉴(?) 수가 없었다. ㅎㅎ


조신하고 예의바르게 소개팅 자리를 잘 마치고(거절하고) 나면, 소개팅 자리에서 늘 먹는 파스타처럼 속이 느끼한 기분이 들었다. 불편한 원피스에 힐을 신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요리를 과식한 기분이 들어, 그냥 편한 츄리닝 바지를 앉고 퍼질러 앉아, 양푼에 밥 한덩이 넣고 온갖 나물에 고추장 한숟갈 넣어 쓱쓱 비벼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나에게 그 양푼 비빕밥은 여자친구들과의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하게 외로운 절친 H와, 금요일마다 퇴근 후 홍대에서 만났다. 그녀와 있을 때 나는 그냥 대학 시절의 내츄럴한 나로 돌아갔다. 일단 1차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갔다. 고기가 땡기는 날에는 고기를 먹고, 어떤 날은 초밥을 먹고, 어떤 날은 철판 요리를 먹었다. 그리고 2차는 맥주, 3차도 맥주, 4차도.... 어쨌든 실컷 상사를 씹고, 직장 동료 뒷담화를 하고, 지난 주에 만난 소개팅 이야기를 하고, 대학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엄청나게 술을 마셨다. 그리고 LP바에 가서 취한 채로 음악을 들었다. 새벽 1~2시 정도까지 그렇게 놀고 나면 가슴 속이 개운해졌다.


원피스를 입을 필요도, 힐을 신을 필요도, 화장도 예쁘게 할 필요가 없다. 말도 조심하게 가려가며 할 필요 없고, 눈치 싸움을 할 필요도 없다. 중간에 화제가 끊겨도, 어색한 침묵을 이기려 대화를 이어갈 필요도 없다. 입에 한 가득 고기쌈을 우겨넣고 맥주를 병째 나발 불어도, 취한 채 말없이 음악에만 귀를 기울여도, 흥에 돋아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흔들어도, 두서없는 얘기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아도 상관없는, 그런 금요일의 밤들을 H와 수없이 보냈었더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유치하게 행복하고 좋았던 때였다.


아이를 낳고 집에서 육아에만 매달리던 약 2년간, 희한하게도 나를 가장 위로해주던 기억이 그 때의 추억이었다. 모유수유를 하며 외출도 힘들 때, 팔목과 어깨가 부러질 것 같을 때, 잠을 못 자서 약간 미쳐버릴것 같을 때, 새벽까지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듣던 그 숱한 여름 밤들을 떠올렸다. 테이블이 쿵쿵 울리도록 크게 틀어놓은 음악, 유리잔에 가득 따른 차가운 맥주, 새벽까지 미친듯이 떠들고 웃고 취하던 그 때... 사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추억인데도 너무 그리웠다. 그냥 아무 의무감이나 마음의 짐 없이, 그저 '나'일 수 있는 시간들이, 나이가 들수록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야구장, 뮤직 페스티벌, 재즈클럽, 미술관, 콘서트장, 혼자 훌쩍 떠난 여행들... 부지런히 놀러다니던 그 시절을 떠올리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비싼 해외 여행도, 특별했던 공연도 아닌, 그냥 평범하게 퇴근하고 친구를 만나 맥주 마시고 수다 떨던, 그 편안하고 꾸밈없던 순간들이다. 마음먹고 실컷 놀아보자, 하고 떠난 자리가 아니라, 그냥 소소한 일상 속의 일부였기 때문인것 같기도 하다.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그저 나 자체로 내보일 수 있는 친구의 존재란 또 얼마나 소중한지...


그렇게 마음껏 풀어져서(?) 놀 수 있는 때도 그때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상황이 안되서 못 노는 것이 아니라, 그 때의 그 마음, 그 기분, 그 공기와 그 분위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떠올리며 그때가 그립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립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해지고 현재에 충실하자는 마음가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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