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각박한 현실 속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가려면
보통 회사에서 사람을 뽑을 때에는 나름대로 원하는 '인재상'에 맞게 사람을 채용한다. 회사에서 원하는 필요한 자질과 스펙을 꼼꼼히 살펴보고 채용한다고 해도 막상 일해보면 그닥 '인재'가 아닌 경우도 있고, 생각했던 것 이상의 역량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결혼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는 결혼하면 이렇게 살아야지, 아이는 어떻게 키워야지, 와 같은 이상을 품고 결혼을 하지만, 실제 결혼생활에는 많은 변수가 있다. 나 혼자만의 생활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우자 한 사람만 내 생활에 쏙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가치관, 문화, 생활습관, 인간관계, 그 사람의 가족, 그리고 훗날 내 아이에게 미칠 영향력까지, 그 모든 것을 내 인생에 개입시키겠다는 약속이 바로 결혼이다.
남자나 여자나 결혼 후에는 어느 정도 양보하고 희생하지 않으면 결혼생활이 유지될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한쪽이 꼼짝없이 져주고 많이 맞춰주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공평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균형이 깨진 관계라면 절대로 안정적이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가 없다.
나는 결혼 생활에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지만, 아이를 가진 후 '엄마', 특히 '워킹맘'이 되고난 후에는 정말 이 각박하고 혹독한 현실 속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고, 10년 간의 커리어를 버리고 석사 졸업장을 땄고, 맘 편히 회사 다니라고 적극 지원해주시는 친정 부모님도 계시고, 집안일과 육아를 적극 담당해주는 든든한 남편의 지원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환경 속에서도 나는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하나, 라는 고민을 진지하게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가장 나를 크게 괴롭혔던 생각은, '나 하나만 회사 그만두면 모두가 편하고 행복할텐데' 라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사랑으로 아이를 봐주셔도, 엄마인 내가 키우던 때와는 달리 미묘하게 '엄마 없는 티'가 나는 것 같은 아이의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팠다.
대학원 다닐 때와는 다르게 훨씬 더 연로해지신 친정 부모님의 모습은 또 얼마나 마음 아픈지... 나는 매일 매일 무심하게 불효를 저지르고 있었다. 퇴근하자마자 내 관심사는 오로지 아이였다. 하루 종일 육아에 지쳐 힘드신 부모님의 안부는 그 다음이었다. 아무리 머리로는 '종일 얼마나 힘드실까' 생각하다가도, 막상 아이에 대한 케어가 조금만 소홀해지면 나도 모르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하루는 아이의 유치원에서 1시간 일찍 하원해야 하는 날이 있었다. 부모님이 잊으실까봐 그 전날에도 말씀드리고 당일 아침에도 말씀 드려놓았지만, 결국 내가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이의 하원시간을 놓쳐, 선생님에게 전화가 온 것이었다. 재택근무 날이었다면 나라도 달려 나갔을 텐데, 나는 2시간 거리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친정 부모님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그대로 하원 버스를 타고 다시 유치원으로 돌아갔다.
정말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그 다시 내 심정은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아이를 안심시키려고 선생님을 통해 목소리를 들었는데, 엄마만이 알 수 있는 잔뜩 주눅이 들고 얼어붙은 목소리로 "응" 이라는 대답만 반복하는 아이의 음성에 눈물만 났다.
친정 부모님은 너무 미안해하셨고, 그 미안해하시는 모습이 더 가슴 아팠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모두가 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노력해도 그런 일이 생긴다. 사실 생각해보면 별 일도 아니다. 아이는 안전하게 유치원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있다가 부랴부랴 뛰어간 할아버지를 만나 집으로 잘 왔다.
하지만 그날, 나는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했다. 내가 너무 욕심부린 걸까. 아이의 어린 시절은 지금 뿐인데, 이렇게 예쁘고 좋은 시기를 내 욕심으로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커리어보다 아이가 한 백배쯤 소중한데,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걸까.
아, 이런 거구나. 이래서 다들 그만두게 되는구나. 나는 나의 교만을 깊이 반성했다. 결혼 전 내가 정말 좋아하던 차장님, 과장님들이 출산 후 복귀하고 나서도 결국 그만두는 것을 볼 때마다, 이해하지 못했었다. 내심 실망까지 했었다. 일하는 '여성'으로서 존경하는 롤모델이라고 생각하던 분들이었는데, 결국 다 똑같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10년이 지나 내가 그 나이가 되어서, 그 입장이 되어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정말 강력한 동기가 있지 않은 이상, 사랑하는 아이의 곁을 떠나 일을 계속 하기란 정말 정말 힘든 일이다.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기 때문에 출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일,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있고 똑똑한 엄마가 평생 전업주부로만 사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고,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며 20대와 30대를 보냈고, 결혼 전부터 출산과 육아 기간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보낼 지 철저한 계획까지 세웠어도, 이렇게 작은 사건 하나로도 심정적으로 무너질 수 있는 것이 또 엄마의 마음이다.
육아라는 기차를 일단 타고 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장소에 가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 주변 워킹맘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렸을 때 그렇게 엄마만을 찾던 아이들이 조금만 크면 일하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한다고, 어떻게든 버티라고 했다. 아이들은 금방 큰다고.
물론 지금은 그런 말보다 당장 엄마를 찾는 내 아이의 목소리가 더 마음에 와 닿지만, 그래도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꾸역꾸역 나의 일을 이어가고 싶다.
내가 느낀 것은 아무리 애써도 아웃소싱할 수 없는 엄마만의 영역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아홉 달 동안 뱃속에 품고 있었으니 아이는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 게다가 5년을 붙어있었으니,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너무 힘들고 어색한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워킹맘의 인생은 많은 가지치기를 하게 된다. 나의 경우, 음소거 버튼을 누르듯 많은 것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아내, 딸, 며느리, 엄마, 직장인, 친구 엄마, 지인, 친구... 여러 가지 역할들이 점점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엄마'와 '직장인' 역할에 선택과 집중을 하고 나머지는 어느 정도 내려놓았다.
고지식한 성격이라 쉽지 않았지만, 조금씩 유연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그런 부분에서는 남편의 성격이 부럽다. 그럴 수도 있지~ 되는 대로 해~ 하다가 안되면 내일 또 하면 되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 보면 길이 나오겠지~ 라고 늘 나를 (아니면 자기 자신을 ㅎㅎ) 북돋아준다.
나는 제품을 사면 설명서부터 꼼꼼히 다 숙지한 후에 제품을 만지는 성격인데, 남편은 그냥 되는 대로 이것 저것 먼저 눌러보고 이어보다가 잘 안되면 설명서를 들여다 보는 성격이다. 둘 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워킹맘의 '자질'에 있어서는 남편같은 성격이 좀더 수월하지 않을까 싶다.
모든 것을 내가 컨트롤할 수 있고 나 혼자만 최선을 다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은 버려야겠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루 하루 다르게 성장해가는 내 아이를 믿고, 멋지게 같이 성장하는 엄마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