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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래블 Sep 23. 2019

18. 산티아고 순례길, 가장 좋았던 하루

걷기 15일차 _ 보아딜라(Boadilla)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Carrion de los Condes) : 27km



오늘은 산티아고에 온 날 중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니 6:30. 호호님 빼고 이미 방 안의 순례자들은 모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한다. 호호님은 순례자들이 모두 출발하고 난 뒤에야 일어나서 나갈 준비를 한다. 그래도 걸음이 빨라서 그날 머물 숙소에는 가장 먼저 도착하는 편이다. 나는 걸음이 매우 느린 편인데도 남들이 다 씻고, 불을 켜야지만 그때서야 겨우 일어난다. 시차적응을 제대로 한 것 같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7시쯤 알베르게에서 나왔다. 어두울 때는 화살표가 잘 보이지 않아 마을을 빠져나가는게 어렵다. 조조님과 브라질에서 온 어떤 아주머니와 함께 길을 헤쳐나갔다. 


점점 밝아지는 세상


날이 점차 밝아지니 길의 모양이 드러난다. 노랗게 물든 길이 나왔다. 옆으로는 수로가 흘렀다. 이곳은 점점 더 가을의 정취가 깊어간다. 


옆으로 수로가 흘렀던 길


가을의 정취가 느껴지는 산티아고 순례길


함께 걸었던 조조님과 호호님 


마을 입구에서 본 수로


예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힘들지 않게 첫 마을에 도착했다. Bar에 들려 카페 콘레체와 햄과 치즈가 든 크로와상을 먹었다. 치즈가 든 것도 맛있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많이 걷지 않고, 또 힘든 길도 아니라 수월하게 걸었다. 게다가 날씨도 오랜만에 맑았다. 어제 빤 두꺼운 등산 양말이 마르지 않아 가방에 매달고 다녔는데 숙소에 도착하니 기분 좋게 말라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인 조개와 마르지 않아 가방에 달고 다닌 양말


순례자들을 안내하는 화살표


길에서 만난 순례자 동상


길을 걸으면서 얻은 교훈은 1시간 걸으면 10분 정도는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뒤에 쫓아오는 사람을 의식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나중에 너무 지친다. 그래서 오늘은 중간 중간 Bar에 많이 들렀다. 두번째로 들어간 곳은 오리가 돌아다니고 주인이 아주 쾌활한 Bar였다. 나는 오렌지 쥬스를 주문했다. 여기는 오렌지 쥬스를 주문하면 직접 눈 앞에서 오렌지를 짜서 준다. 오렌지를 짜는 기계가 왠만한 가계에 다 하나씩 있다. 그래서 오렌지 쥬스가 정말 맛있다. 두번째 Bar까지 성공적이다. 


주인이 밝아 마음에 들었던 바


오늘은 그야말로 평지를 계속 걸었다. 걷는 내내 표지판도 잘 보이고, 날씨도 좋아 기분 좋게 걸었다. 가끔 표지판이 안보이면 내가 제대로 가고 있나 불안할 때가 있는데 오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길을 잃어버릴 수가 없을 정도로 표지판이 많았던 길




걸으면서 인내에 대해 생각했다. 20대의 나는 눈 앞의 행복, 지금 당장 몸이 편하고 즐거운 것만 찾았다. 그것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욜로족이었다(YOLO -You only live once). 그런데 하루하루 힘들게 걷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인고한 끝에 얻은 행복은 더 값질 수 있다는 것. 그 끝에 행복이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길에 끝에서 행복을 맛보게 된다면 그맛은 인스턴트 같이 자극적인 맛이 아니라 오래 끓인 곰국 같은 맛이 아닐까 생각했다. 두고두고 오래 끓여먹고, 우려먹을 수 있는 맛.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런 여행이 아닐까 싶다.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 도착! 


사막 같은 농경지를 지나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 도착했다. 멀리서 봐도 그동안 마을에 비해 꽤 큰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른 숙소로 갔다. 예약이 안 되는 곳인데 혹시 자리가 금방 다 차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이곳은 기타 치는 수녀님이 계신 곳으로, 저녁 시간에 다함께 둘러앉아 순례자들이 노래를 부르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오늘은 아쉽게도 공사 소음으로 인해 작은 음악회는 진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침대는 많이 남아 있었다.


마을의 성당


볕이 좋아 마당에 빨래를 널었다. 보통은 건조기를 이용하는데 오늘은 볕이 아주 잘 드는 마당이 있는 알베르게라 마당에 널었다. 좋다.


알베르게 마당


그리고 마당에 앉아 e북으로 '서른의 반격'을 읽다가 오후 5시, 마트가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장을 보러 갔다. 오랜만에 큰 마트에 가니 어찌나 사고 싶은 과일이 많은지... 스페인은 마트 물가가 진짜 싸다. 정말 다 쓸어담고 싶었지만, 짐이 많아지면 안되는 순례자의 신분으로써 딱 오늘 저녁 먹을 재료와 내일 먹을 간식만 샀다. 


오늘의 메뉴는 닭볶음탕이다. 마트에서 닭다리, 감자, 당근, 양배추, 양파, 마늘을 사서 닭도리탕을 끓여 먹었다. 고추장은 호호님이 들고 다니신다. 감사하다! 


여기서 한국 요리를 제대로 배워간다. 감바스, 닭볶음탕은 이제 집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닭볶음탕, 밥, 그리고 와인을 함께 먹었는데 그 맛이 어찌나 좋은지 정말 맛있었다. 오늘 알베르게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 부자(父子)에게도 조금 나눠주고 독일인 메알지와도 함께 나눠 먹었다. 그 덕에 마엘지가 사온 와인과 바게트를 나눠 먹을 수 있었다. 또 어제부터 함께 한 프랑스 아주머니도 우리 옆에 앉았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데 서로 의사소통 하려고 되게 노력한다. 그게 재밌어서 좋다. 


오늘 저녁


이렇게 함께 하는 자리가 재밌어서 미사에 가기 싫기도 했으나 7:30 미사에 갔다. 미사 시간에 수녀님들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했다. 그동안은 성당 규모가 워낙 작아서 반주를 하는 사람이 아예 없었는데 오랜만에 기타 반주가 나와서 좋았다. 내가 바이올린을 좀 더 잘했다면 바이올린을 들고 다니며 매 미사 영성체 후 묵상 시간에 연주를 했어도 참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순례자를 위해 축복해주시는 신부님과 노래를 불러주신 수녀님


미사가 끝나고 신부님께서 순례자들을 위해 따로 기도도 해주셨고, 도장도 찍어주셨다. 저번 미사 때 도장을 못 받은 것이 아쉬웠기 때문에 이번에는 순례자 여권을 잊지 않고 챙겨갔다. 신부님께서 찍어주는 도장은 아주 화려했다.


2층 침대 위에서 (난간이 없음)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오늘만 같아라'라는 생각이 든다.

날씨도 좋고,

길도 수월했고,

빨래도 잘되고,

음식도 맛있었고,

미사도 좋았다.

조금씩 산티아고 길이 좋아진다.




산티아고 순례길 TIP


Q. 순례길 도중 빨래는 어떻게 하나요?


샤워를 하면서 손빨래를 할 수도 있고, 알베르게에 있는 세탁기로 직접 빨래를 할 수도 있다. 물론 세탁기를 이용하는 것은 유료다. 보통 세탁 3~4유로, 건조 3~4유로 정도 한다. 사람들끼리 빨래를 모아서 같이 돌리면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나는 가져간 여분의 옷이 거의 없고, 손빨래를 하는게 너무 피곤해서 거의 매일 세탁기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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