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왜 왔지?!' 젠장, 산티아고 순례기
21일 차 _ 베가 데 발가르세(Vega de valcarce) >> 알토 데 포요 (Alto de poyo) : 21.8km
완전 푹 잘 잤다.
제일 안쪽 방인 데다가 코를 안고는 외국인 아주머니와 둘이 방을 써서 아주 조용하고 맘 편히 잘 수 있었다. 덕분에 늦게 일어나서 7:30에 출발했다. 숙소에 머물렀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발했길래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나도 출발했다.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 앞이 깜깜했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앞으로 가는데 조금 무서웠다. 거의 8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인데도 어둡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서웠다.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것도 안 보인다. 괜히 더 무서워져서 앞만 보고 걸었다. 그래도 다음 마을이 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해가 뜨면 별이 점차 사라지는 게 당연한 것인데도 참 신비롭다. 사실 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텐데 낮이 되면 사라졌다가 밤이 되면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 당연하지만 의식하지 않고 지냈던 사실을 이곳에서 새삼 느낀다.
아침을 먹으러 바에 들어가니 사람들로 북적하다. 역시나 카페 콘레체에 초코가 든 빵을 먹었다. 이 맛을 어찌 잊으리오. 아침도 먹었으니 힘을 내어 길을 떠난다. 어제 버스를 탄 덕분에 오늘은 일정이 짧아 발걸음이 가볍다.
가을에 물든 산을 올라가는 날이다. 풍경이 아름다웠다. 혼자라 여유로웠고, 일정도 짧아 사진도 찍으면서 천천히 길을 걸었다. 아침 발걸음이 제법 가벼웠다.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바로 전날 저녁. 티비를 보며 달달한 매실주스와 함께 삶은 밤을 까먹었다. 먹으며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데 굳이 산티아고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밤을 보니 그때 맛있게 먹었던 그 밤이 생각났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풍경이 멋있었다. 유럽 특유의 목가적인 풍경이 그대로 나타났다. 어떤 곳은 나무가 자라고, 어떤 곳은 나무 없이 풀만 자라고 있었다. 태양이 정수리 위로 올라가기 전, 비스듬히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은 자연이 가장 아름답다. 자연도 조명빨을 받나 보다.
더 올라가니 구름이 가득한 풍경이 나타났다. 환상적이었다. 산티아고를 걸으며 이런 풍경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누구도 산 중턱에 구름이 흐르는 곳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곳은 항상 이런 것일까? 아님 오늘이 특별한 것일까? 구름이 보이는 언덕에 테이블과 벤치가 있어서 그곳에 앉아 바게트 빵을 점심으로 먹었다.
엘 세브레이로에 작은 성당이 하나 있는데 들어가니 어떤 남자가 반겨준다. 성당을 안내하는 봉사자인가 보다. 산티아고의 상징인 노란 화살표가 그려진 돌멩이를 건네며 한국어로 쓰인 문장 하나를 보여준다. 번역 투라서 한 번에 와 닿지 않았지만 그 사람의 따뜻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인생은
사랑과 희망이 함께 할 때만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쉬엄쉬엄 걸으니 좋다. 숙소에 도착하니까 3시쯤이다. 내가 숙소에 일찍 도착한 편이었다. 많은 침대가 있었는데 내 기준 가장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샤워도 내가 제일 먼저 한 것 같다. 여유롭게 샤워를 하고 빨래를 했다.
산 중턱에 있는 알베르게라 주변에 식당이 없다. 알베르게에서 파는 저녁을 먹었다. 돈을 내고 사 먹는 것이지만 저녁을 차려주니 참 좋다. 메뉴는 갈리시아 수프와 갈비찜 비슷한 것, 그리고 산티아고 케이크였다. 내 앞에는 독일인 아저씨 두 명이 앉았다. 독일어로 둘이서만 말해서 내가 껴들 수가 없었다. 내 옆쪽에는 독일인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래도 그 여자가 영어로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고 말도 걸어주고 그랬지만 독일인들 사이에서 저녁 먹는 내내 혼자 뻘쭘했다. 영어라면 차라리 알아듣기라도 할 텐데 독일어는 아예 모르겠다. 긴 테이블에 20명도 넘는 순례자가 함께 앉아있는데 나 혼자만 동양인이었다. 산티아고에 한국인이 많다고 하는데 내 체감상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분명 생장에서 처음 순례길을 시작할 때는 한국인이 엄청 많았는데 다들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간 것일까?!
Q. 산티아고를 걸으면 살이 빠질까?
사람마다 다르다. 조금 빠졌다는 사람도 있고, 나는 하나도 안 빠졌다. 하루에 4~5만보 이상 걷는데 살이 하나도 안 빠지다니... 충격이었다. 그렇다고 많이 먹은 것 같지도 않은데... 아침, 점심은 보통 빵 하나에 커피 한 잔. 중간중간 과일이나 초콜릿을 간식으로 먹었고, 저녁만 조금 푸짐하게 먹었을 뿐인데. 한국에 있을 때에 비해서는 정말 조금 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살이 빠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1kg도 안 빠졌다.
다행히 살이 쪘다는 사람은 못 봤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