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 왜 왔지?!' 젠장, 산티아고 순례기
걷기 23일 차 _ 사리아(Sarria) >> 곤자르 (Gonzar) : 30.5km
아침에 사리아에서 출발했다. 사리아에서 시작하는 순례자들이 많은지 아침부터 뭔가 북적북적했다. 산티아고에 도착해 순례자 증명서를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사리아에서 산티아고까지는 꼭 걸어야 한다. 그래서 사리아에서 출발해 산티아고까지 걷는 사람도 많다(약 100km).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노란 화살표 앞에서 사람들이 사진 찍고 막 난리였다. 순례길의 첫걸음을 떼는 사람들인가보다. 이들과 함께 길을 걸었다.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어두운 밤, 많은 사람과 함께 걸으니 그들의 페이스에 맞춰 쉽게 앞으로 나아갔다. 첫 bar까지 이들과 함께 걸었다.
나는 bar에 아침을 먹을 겸 들어갔는데 뭔가 맛이 없어 보여 도로 나왔다. 그런데 같이 걷던 사람들은 이미 다 떠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혼자 걷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확 무서웠다. 오늘따라 안개가 너무 심했다. 아침 7시부터 걷기 시작해서 이제 7:40쯤 됐으니까 곧 해가 뜨겠지 생각하며 걸었는데 8시가 넘고 9시가 가까워질 때까지 해가 뜨지 않고 어두컴컴했다. 안개 때문에 해도 늦게 뜨나 보다. 하필 걷는 길도 주변에 건물이 없는 숲길이라 더 무서웠다.
뒤를 돌아보며 내 뒤에 누가 따라오나 계속 확인했다. 뒤에 쫓아오는 불빛이 있어서 그래도 내 뒤에 사람이 있구나 안심하며 걸었다. 드디어 다음 bar가 나타났다. 내 뒤를 걸어오던 안쏠린이란 스페인 아저씨와 같이 아침을 먹었다. 카페 콘레체와 크로와상을 먹었다. 카페에서 크로와상을 따뜻하게 데워준 데다가 잼과 버터까지 따로 챙겨줘서 너무 좋았다. 음식을 다 먹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아저씨는 옆자리 사람들이랑 얘기하느라 바쁘다. 소심하여 아저씨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먼저 bar에서 나왔다. 제대로 인사하고 나올걸 그랬나 미안해하며 길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사과를 먹으며 쉴 겸 바위에 앉아 쉬는데 마침 안쏠린이 지나갔다. 갈리시아 출신인 안쏠린은 갈리시아에 대해 많이 아는 역사 선생님 같았다. 같이 걸으며 산티아고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산티아고는 갈리시아의 상징이라고 했다. 옛날 무슬림이 유럽을 쳐들어 올 때 남쪽까지는 정복할 수 있었지만 산티아고가 있는 이곳 북쪽까지는 올 수 없었고, 이곳은 지켜냈기 때문에 다시 전쟁을 통해 무슬림을 이 땅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곳이 중요하다고 한다.
또, 갈리시아의 옥수수 저장 창고인 오레오, 갈리시아식 리어카(?)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다. 안쏠린 덕분에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설명을 듣고 나는 다시 혼자 길을 걸었다. 안쏠린은 다른 대화 상대를 찾았는지 내가 인사해도 눈길도 안 준다. 나는 이제 혼자 걷는 게 편하다. (서양 아저씨들 진짜 짜증남. 할많하않)
나는 계속 혼자 걸었다. 포르토마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큰 강을 건너야 했다. 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에 발을 딛자 눈앞에 멋진 강이 펼쳐졌다. 강 색깔이 너무 시원하고 예뻤다. 높은 다리 위에서 강을 바라보니 우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우리나라는 둑 공사를 해놓은 강이 많아서 강의 모양이 천편일률적이다. 항상 강 옆에는 산책로와 자전거 길이 마련되어 있는 느낌. 나름의 편리함은 있지만 개성은 없다. 반면 이곳의 강은 둑이 없이 더 자연스러운 형태로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흐르는 것 같다. 다리를 건너 포르토마린에 도착했다.
포르토마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 계단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햇살이 빛나는 벤치에 앉아 있으니 이곳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가야 할 길이 멀다.
하루에 20km가 딱인 것 같다. 25km까지도 힘들지만 걸을 수는 있다. 그런데 25km가 넘어가면 헬이다. 겨우겨우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다. 힘들면 내가 왜 이 길을 걷는지 생각하게 된다.
나는 왜 이 길을 걷는 걸까?
이 길의 끝에서 얻길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힘들게 한발 한발 나아가며 오직 신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성직자들의 인생이 얼마나 힘들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이곳에 오기 전 명동성당에서 요한복음을 공부하다가 왔다. 예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곱이 예수의 이야기를 전파하기 위해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 나도 예수님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봤다. 아무 죄도 없는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어렸을 때부터 성당에서 '예수님은 우릴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왜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죽었는데 날 위해서 죽었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걸으면서 그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마 그 죽음이 2000년이란 시간을 지나 현재를 살고 있는 나에게까지, 그리고 수많은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죽음을 생각하며 감동을 받고, 힘을 얻고, 그와 같을 수 없겠지만 닮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지금 내가 겪는 고통도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걷는 이 길이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이 발걸음을 통해 지난 나의 과오를 뉘우치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더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걸으니 힘든 것이 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곤자르 도착!!!
공립 알베르게 대신 미리 알아둔 카사 가르시아(Gonzar Casa garcia)에 들어갔다. 깨끗한 시설이 마음에 들었다. 샤워 시설은 완전 나이스였다. 뜨거운 물이 아주 콸콸~ 수압도 온도도 쌨다. 나는 빨래를 맡기고, 같은 숙소에 머무는 독일인 라우가와 함께 숙소에서 나오는 저녁을 먹었다. 나한테 먼저 저녁 같이 먹자고 제안해줘서 고마웠다. 10유로인데 3코스로 제법 훌륭하게 나왔다. 샐러드, 스테이크, 티라미수에 와인까지! 샐러드는 조금 평범해서 갈리시안 스프를 주문할 걸 후회했지만 스테이크는 베리굿이었다.
라우가는 26살이다. 힘들게 걷고 라우가랑 얘기하면서 저녁을 먹으니 위로가 되었다. 내가 산티아고에서 느끼고 있었던 불편함을 라우가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나만 그런 줄 알고 내가 이상한 건가 우울해했는데 나만 그런게 아니었다! 혼자만의 공간이 너무 부족하고, 15~20km 이상 걷는 것은 너무 힘들고, 힘들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고, 무리하고 나서는 발이 아파 더 걷기 힘들어졌는다는 것, 버스를 타는 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죄책감 들고 슬프다는 것까지. 공감만으로 큰 힘이 됐다. 오랜만에 친구랑 수다 떨면서 밥 먹는 기분이었다.
라우가와의 식사는 오늘 고생한 나에게 하늘이 준 선물 같았다.
기도하면 이루어진다.
그래서 기도를 해야하는 것 같다.
wish list
1. 남은 3일 행복하게 산티아고를 걸을 수 있게 해주세요.
2. 우리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3. 한국에 돌아가서 남자친구와 어쩌구 저쩌구........ -> 실패...
4. 산티아고가 끝나고 가는 포르투, 네덜란드 여행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5. 항상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한국 가면 하고 싶은 것
1. 요리 배우기
2. 가족들에게 요리 해주기 (바케트, 감바스, 스테이크, 와인) -> 이건 성공!
3. 영어 더 배우기
계속...
Q.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경비는 어느 정도인가요?
나는 26일 동안 산티아고를 걸었다. 산티아고 26일(120만원)+비행기 티켓(130만원) = 약 250만원 정도 들었다.
비행기는 싸게 사면 100만원 이하로 잡을 수 있다. in/out 도시를 같은 곳으로 하고, 경유 편을 이용하면 티켓이 저렴하다. 나는 파리 in/ 포르토 out 으로 인아웃 도시를 다르게 잡고, 또 파리로 갈 때 직항 편을 타서 비행기 티켓이 비싼 것이다. (나는 항공에 관련해서는 돈 아끼는 것보다 편한 게 좋다.)
순례길에서 하루 경비는 30유로로 잡았다.
10유로 = 숙박비
10유로 = 식비
10유로 = 빨래, 간식, 기타 등등
물론 30유로 보다 더 쓴 날도 있고, 덜 쓴 날도 있다. 사립 숙소에서 자거나, 저녁을 밖에서 사 먹으면 30유로 이상 쓰게 되고, 공립 알베르게에서 자고 마트에서 장을 봐서 요리를 해먹으면 30유로 보다 덜 썼다. 매일 저녁 얼마나 썼는지를 기록했다. 30유로보다 더 쓰는 날에는 다음날 그만큼 아끼려고 노력했다. 물가가 싸다고 생각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쓰면 나중에 예상보다 많이 쓸테니 틈틈히 정산하는 것이 좋다. 참고로 몸이 좀 더 편하고 싶다면 하루 예산을 넉넉히 잡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