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소리가 모래 언덕을 넘어 그 곳에 닿기를.(스포주의)
드니 빌뇌브는 아주 이상한 감독이다. 분명 원작이 따로 있는 작품 위주로 필모그래피를 채워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들 속에 흐르는 공통의 메시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작가주의 감독들의 영화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기분을 원작이 전부 다른 작품에서 해석해 낼 수 있는 연출력이라는 점만 보더라도 그의 신작을 기대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듄>은 개봉 전부터 우려의 목소리 또한 적지 않았다. 원작의 명성이 엄청난 데다 데이빗 린치가 연출한 <사구>(‘듄’과 같은 뜻인 ‘모래 언덕’. 당시엔 저 제목으로 개봉했었다.)의 처참한 실패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대와 우려를 양손에 쥐고 늦은 밤 천호동의 한 아이맥스관에 자리를 잡았다.
나에게 <듄>은 드니 빌뇌브가 줄곧 해오던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더 확신하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스스로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젊은 청년 폴(티모시 샬라메)이 미지의 세계(사막)로 들어가 그곳의 방식을 이해하고 구원자가 되는 이야기. 그러니까 드니 빌뇌브는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를 해왔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에서 타인 혹은 다른 세계를 이해하거나 알아가는 것은 너무 어렵고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 <컨택트>에서 외계 생명체의 진짜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 <시카리오>에서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카르텔을 소탕하려 하는 베네치오 델토로가 가족을 잃은 이유에서 그런 행동을 한 걸 마지막에서야 알게 된 에밀리 블런트, <그을린 사랑>에서 어머니가 한 유언의 이유를 어머니의 삶을 거꾸로 따라간 끝에 알게 되고 충격을 받는 남매의 모습.
드니 빌뇌브의 세계는 익숙한 세계와 익숙하지 않은 세계로 나뉜다. 익숙한 세계에서 익숙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갔을 때 인물은 혼란스러워 하다가 성장하거나 충격을 받고 무너진다. 그 안에 존재하는 인물들 또한 각자 하나의 세계로 기능한다. 타인의 세계를 알았을 때 성장하거나 무너진다.
<컨택트>에서와 같이 <듄>에서도 ‘언어’의 다름으로 그 대비를 보여주었다. 일상어, 수화(손짓 언어), 외계어, ‘목소리’, 일정한 리듬. 각각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존재들이 전부 다르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그 세계로 입장할 수 없다.
‘목소리’를 사용할 때 음향 효과 또한 흥미로웠다. 극 초반에 폴이 ‘목소리’를 사용할 때 여러 겹으로 배우의 목소리가 중첩되어 나오는 음향 효과를 썼는데, 그 싱크가 맞지 않다. 마치 메아리처럼 나뉘어 들린다. 하지만 그가 성장하고 극 후반부 ‘목소리’를 사용할 땐 그 싱크는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는 하나의 언어를 배우며 성장한 것이다. 미숙했던 폴이 시련을 겪고 성숙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파트 1에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전투는 예언된 장면과 다르게 펼쳐진다. 예언의 장면에서 폴은 상대방에게 패배해서 죽는다.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 폴은 상대방을 죽이고 승리한다. 예언의 장면들 혹은 꿈의 장면들과 다른 실제의 모습이 펼쳐진다. 주어진 운명, 즉 지도자가 될 운명을 의심했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당면한 시련 끝에 운명 자체에 순응하는 듯 극이 마무리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 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이디푸스가 운명을 받아들인 이후 자신이 진짜 해야 할 일을 깨달았던 것처럼, 그는 지도자의 운명을 깨닫고 두려운 미래를 극복한다. 폴은 이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미래로 두려움 없이 나아갈 것이다. 이것 또한 꿈의 언어를 현실에서 해석하는 방법을 깨닫는 과정이지 않을까. 영화 시작에 나오는 ‘꿈은 심연의 메시지다.’라는 잠언을 폴이 현실에서 깨달으면서 <듄> 파트 1은 마무리된다.
티모시 샬라메는 가냘픈 몸, 갈등하는 얼굴을 가진 완벽한 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클로즈업이 영화관의 화면에 비칠 때마다 관객들은 스스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선택에 있어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티모시 샬라메 덕분에 영화 <듄>은 원작의 방대한 서사를 생략하고도 풍부함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청춘과 청년의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해내는 것에 질투심이 느껴질 정도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좋은 배우의 얼굴이란 선택 앞에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인물이나 배우는 항상 흔들리고 미끄러지고 당황하니까. 나이가 들었을 때도 그는 그런 얼굴을 가지고 있을지 상상해보게 된다.
한 해가 마무리되어가는 요즘,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마주하면서 나는 좌절했는지 성장했는지, 타인의 세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앞으로 그럴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본다. 어렵다.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그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면서 책임감도 커진다. 폴과 같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까. 내 목소리를 건조하고 황량한 미지의 모래언덕을 넘어 누군가에게 닿게 할 수 있을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 있을까...
중요한 건 몸을 움직이는 것이겠지. 고민하며 동시에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겠지. 그러다 보면 다른 세계에 내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겠지... 중얼중얼거리며 나름의 희망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