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는 폭력의 표식
흑백의 화면 속, 손을 꼭 잡고 뛰고 있는 아이 둘의 뒷모습이 보인다. 둘은 어딘가로 도달하기 위해 뛰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뛰고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으면서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뜀박질이다.
화면이 컬러로 바뀌고 나이가 든 세자매가 뒷모습으로 한 명씩 소개된다. 그녀들은 어릴 적의 그곳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난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카메라를 등진 채 그곳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은 벗어나야 할 곳은 명확했지만 가야 할 곳은 정해지지 않은 채 각자의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어디로 도달한 걸까. 어딘가로 도달하긴 한 걸까.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근원적으로 대물림되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세자매의 분투를 치열하게 그려낸다. 때론 과잉으로 보이는 설정 혹은 불필요해 보이는 장면들도 많은 투박한 만듦새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야기의 힘과 배우들의 호연으로 관객들의 머리를 정면에서 내리친다. 관객은 자신의 이마에서 흐르는 뜨겁고 끈적이는 피를 발견하게 되고 곧 생기게 될 흉터, 즉 폭력의 표식을 스스로 확인하게 된다. 그 불편한 발견, 카인의 이마에 새겨져 있던 죄인의 표식이 스스로에게도 있다는 것, 자신이 걸어온 삶의 어느 순간에나 폭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마주하게 될 때 역설적이게도 이상한 안정감을 얻는다. 그러니까 영화 <세자매>는 폭력으로 폭력을 치유하고자 하는 뒤틀린 위로와 같다.
폭력은 방향성을 가진다.
세자매의 아버지가 아내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가했을 땐 위에서 아래로, 스스로에게서 타인에게로 향했다. 아버지가 심어놓은 폭력의 씨앗은 그 방향이 점점 변형된다.
희숙(김선영)의 폭력은 밖이 아니라 안으로, 그러니까 스스로에게로 향한다. 자기혐오와 자해를 통해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 폭력으로 인해 잠시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미옥(장윤주)의 폭력은 안과 밖으로 동시에 행해지고 무작위의 방향성을 가진다. 하지만 절대 아래로 향하는 폭력은 용납하지 않는다. 남편이 자신을 감싸주려고 아들을 때리는 장면에서 그녀는 오히려 아래로의 폭력을 행사한 남편을 응징한다. 남동생을 때리는 언니를 두고 볼 수도 없다. 그러니까 미옥의 폭력은 아래보다는 위로 향한다.
미연(문소리)은 아닌 척 하지만 아버지와 제일 닮아있다. 위에서 아래로, 스스로에게서 타인에게로 향하는 폭력. 제일 손쉽게 일어나는 형태다. 그녀는 딸을 크게 다그친 이후 스스로의 모습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후회한다. 마지막 연회 장면의 클라이맥스에서는 미옥에게 어릴 때 아버지의 눈빛과 똑같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세자매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지만 폭력은 그 방향성만 바뀐 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든 내부로부터 시작된 것이든 말이다. 결국 그들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폭력이라는 단순하고 효과적이며 즉발적인 것을 누려야 하나. 아니면 영원한 폭력의 표식을 지닌 채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나. 영화는 끝내 답을 내어놓지 않는다. 세자매가 서로 의지하며 사진을 찍는 감상적인 엔딩 뒤편엔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세자매의 아버지는 왜 끝내 사과하지 않고 벽에 이마를 찍은 것일까. 투명한 유리벽에 흩뿌려진 피를 보며 구약성경의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라 불리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카인과 아벨은 형제였다. 둘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는데 아벨의 것만 받으시고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샘이 난 카인은 아벨을 살해했다. 하느님이 그걸 아시고 카인에게 세상을 떠도는 벌을 내리셨다. 카인은 어느 순간 자신의 죄를 깨닫고 사람들에게 살해당할 것을 걱정했다. 하느님은 카인의 이마에 표식을 찍어주어 살해당하지 않게 하셨다.
이 이야기를 떠올린 나는 아버지가 벽에 이마를 찍은 이유를 추측해본다. 아버지는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죄를 어느 순간 깨닫고 사람들에게 혹은 자식들에게 버려질까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당사자에 대한 사과가 아닌 기독교의 교리로 희석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하느님이 카인의 이마에 표식을 남겨주신 것처럼 자신의 이마에도 표식을 남겨주어 자식들과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지 못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기도해도 그 표식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다신 폭력을 쓰지 않아도 말이다. 연회장에서 사 남매의 성토를 마주한 아버지는 사과를 하라는 자식들의 말은 들리지 않고 그저 두려움에 도망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스스로 벽에 이마를 찍어 피를 내고 흉터를 만들었다. 그것이 마치 하느님이 주신 표식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자신의 이마에 죄인이라는 표식을 남기면 모든 게 용서되지 않을까라는 뒤틀리고 비겁한 생각을 한 것이다.
아버지의 이마엔 하느님이 찍은 죄인의 표식이 아니라 자신의 폭력으로부터 시작된 폭력의 표식이 새겨졌다. 그 흉터는 공허하다. 사과 없는 자해의 흔적일 뿐이고, 이상하게도 스스로 잠시 동안 편안한 마음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사과가 없었기에 자식들도 결코 그 폭력을 용서할 수 없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들은 폭력이 남긴 흔적들 때문에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들에게 남겨진 폭력의 표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필자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부족한 논리를 인정하는 바이고. 그저 아주아주 주관적인 해석으로 봐주길 바란다.)
배우의 얼굴은 힘이 세다.
감독은 영화를 찍기 전부터 배우들이 반짝이는 작품이 되길 의도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러닝타임 대부분이 세자매의 클로즈업 샷으로 채워진다. 강렬한 사건을 마주한 인물의 얼굴을 지긋하게 보는 것만큼 연기를 살려주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이 깔아놓은 판을 넘어서 세자매를 연기한 배우들의 힘은 대단했다. 짊어질 것이 많은 설정 안에 좋은 배우를 위치시켰을 때 그것을 해내는, 그것을 뛰어넘는 연기를 보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다. 특히 문소리, 김선영 배우가 그러했고 나머지 배우들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개인적으로 현봉식 배우의 연기도 참 좋았다. 문소리 배우는 제작자로 참여하며 극본에도 의견을 냈다고 한다. 영화제에서의 수상소감 또한 울림이 있었다. 배우가 인물을 연기하는 것을 넘어 시대에 대해 코멘트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문소리는 배우의 얼굴로도 문소리의 얼굴로도 소리를 낼 수 있는 영화계의 귀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처음부터 언급했던 것처럼 무겁고 커다란 주제와 배우들의 호연에 비해 아쉬운 부분이 많은 영화였다. 감정을 과잉으로 쏟아내기만 하는 인물과 대사, 엔딩 음악의 부조화, 이야기 스스로 책임지지 못한 이야기, 말하지 않는 카메라 등의 많은 부분들이 그러했다. 여성 서사로서 그 주체의 정체성에 대해 깊게 다루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세자매>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그 많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정면 승부하는 작품이 있었던가. 마주하기 싫은 모습을 드러낸 영화가 있었던가. 배우들이 이렇게 반짝이는 작품이 있었던가. 만든 사람들의 의지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영화가 있었던가. 이처럼 거칠지언정 마음이 전달되는 작품을 오랜만에 만난 것이 반가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