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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이제 그만 끝낼까 해.

I’m thinking of ending things.

by 피스타치 유

영화의 시작. 꽃과 식물이 가득 그려진 벽지가 보이고 여자의 목소리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이런 생각이 한 번 찾아오면 내 머리를 계속 지배한다. 어쩔 도리가 없다. 그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다. 먹을 때, 잠자리에 들 때, 잠잘 때, 깨어날 때 늘 그 생각뿐이다. 오래 전부터 생각한 건 아니다. 새로운 고민인데 동시에 오래된 느낌이다. 언제 시작됐더라? 새롭게 빚어낸 생각이 아니라 내 머리에 박혀 있던 거라면? 입 밖에만 내지 않은 거라면?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끝이란 항상 이런 것인지도. 제이크가 말했다. ‘때로는 생각이 행동보다 진실과 현실에 가까워. 말과 행동은 속여도 생각은 그럴 수 없거든.’ 도로는 텅 비었다. 주변은 조용하고 적막하다. 예상보다 더 그렇다. 볼 건 많지만 사람은 적고 빌딩과 주택도 별로 없다. 하늘, 나무, 들판, 울타리, 도로와 자갈 갓길...’


영화의 마지막. 제이크와 사람들은 노인분장을 하고 있다. 제이크는 노벨상을 받고 의지와 희망이 담긴 노래를 부른 뒤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받는다.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잠시 동안 화면 전체가 푸른색으로 채워진다. 화면이 옅어지고 완전히 눈에 덮여있는 트럭이 보이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출처 - 구글


이 영화의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은 아마 한 사람일 것이다. 학교 관리인으로 보이는 늙은 모습의 제이크다.

처음 여자의 목소리를 빌려와서 말했던 것도 늙은 제이크일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심지어 젊은 제이크까지 늙은 제이크가 만들어낸 인물일 것이다. 1.33:1 이라는 요즘 흔치 않은 화면 비율은 한 사람의 얼굴과 내면을 담기에 알맞게 느껴진다.

늙은 제이크가 상상하고 조립한 세상은 그대로 영화가 되었다. 그 상상의 끝에는 ‘이제 그만 끝낼까 해.’ 라는 말에 대한 대답이 놓여있다. 차갑고 쓸쓸하고 고독한 죽음. 하늘보다는 진하고 바다보다는 연한 푸른색을 닮은 우울한 죽음이다. 상상을 넘어 망상의 세계로 간 늙은 제이크는 결국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원작 소설에선 그의 죽음이 명확하게 그려진다고 한다.)


영화를 총 두 번 보았다. 처음 본 뒤 리뷰를 적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쉽게 글이 쓰이지 않았다. 내용의 난해함 때문에 알맞은 글의 형식이 생각나지 않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영화가 주는 우울한 감각을 너무 흡수해버린 탓이기도 했다. 나 또한 제이크처럼 어느 순간부터 상상과 망상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올 때의 지독한 외로움에 허덕이기도 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로 계속 다른 상황들을 가정하고 상상해본다. 결국 바뀌는 건 없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 즈음. 문득 번뜩이는 생의 감각이 찾아온다. 피부로 느껴지는 고통과 죽음을 생각한다. memento mori(너의 죽음을 생각하라). 생각이 끝없이 아래로만 향하다가 이내 사방으로 뻗어나가려는 의지와 희망을 느낀다. 역설적이다. 이 글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감상을 모아놓은 것일 뿐이다. 한 맥락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정리할 수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된다고 느꼈다.


출처 - 구글


thing 1. 본도그 bonedog


영화의 초반 차 안에서 여자 친구(제시 버클리)는 자신이 창작했다는 시를 낭송한다. 그녀는 시의 제목을 말하고 잠시 차 뒤의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 장면을 들여다보는 관객 혹은 늙은 제이크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집에 오는 건 끔찍하다’로 시작되는 이 음울한 시는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는 집에 대해 이야기한다. 집에 남아있는 건 외로움, 침묵, 권태, 그리고 bonedog다. 돌아오는 곳은 뼈의 집. 그러니까 죽음의 집이다. 그녀는 시의 후반부에서 부감으로 찍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지금 네가 보는 건 전부 뼈’ 관객에게 지금 너희가 보고 있는 영화는 뼈라고, 생명의 온기는 이미 지나가고 없다고,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늙은 제이크의 망상 속 인물들은 죽음으로 가는 길을 이미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표정은 결연하기도 슬픔에 차 있기도 하다.



thing 2. 추상화 혹은 풍경화


여자 친구의 직업은 계속 바뀐다. 물리학자, 화가, 노인학 연구자, 웨이트리스 등. 늙은 제이크는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모든 욕망을 여자 친구의 직업에 부여했다. 물리학 연구에 성과를 내어 노벨상을 받는 것이라거나 현재 노인이 된 자신을 보살펴주지 않는 사회에 대한 생각을 노인학 전공자이며 친절한 여자 친구로 그려냈다.

나는 그 중 화가라는 직업에 주목했다. 어릴 적 누구나 예술가가 되고자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예술가가 되는 것에는 재능이나 환경, 가치관 등 여러 장애물이 존재한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예술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술가의 실제 삶이 그리 로맨틱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식사자리에서 여자 친구와 아버지는 추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버지는 추상화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다행히 여자 친구는 풍경화를 그린다. 아버지는 이번엔 인물이 들어있지 않은 풍경화에선 아무 정서를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여자 친구는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안의 인물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늙은 제이크의 망상은 추상화는 아니지만 인물이 들어있지 않은 풍경화와 같다. 아버지의 말처럼 이 풍경화를 처음 볼 때 관객은 어떤 정서를 담고 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늙은 제이크가 그 안에 없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는 집의 지하로 내려가서 제이크가 그린 그림을 발견한다. 유명화가(Ralph Albert Blakelock)의 그림을 따라 그렸지만 형편없는 그림일 뿐이다. 그 형편없는 그림과 늙은 제이크가 망상으로 그린 세계는 같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예술로 풀어낼 수 없었다. 그에겐 예술적 재능도 환경도 가치관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그에게 위로를 준 것 같지도 않다. 어떨 때 예술이라는 건 겉만 화려하고 속이 비어있는 것 같다. 실제의 삶에 아무 위로도 건넬 수 없는 무기력한 모습도 예술의 한 면이다.


출처 - 구글


thing 3. 액자


영화 시작에 보이는 벽지는 늙은 제이크의 집이다. 그는 홀로 앉아 작은 텔레비전을 보며 밥을 먹은 뒤 출근을 한다. 망상 속에 제이크와 여자 친구가 도착하는 부모님의 집은 출근을 해서 비어있는 늙은 제이크의 집인 것이다. 여자 친구는 그 집에서 제이크와 부모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본다.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던 지하실의 세탁기에선 학교 관리인 유니폼이 돌아가고 있다.

늙은 제이크의 현실은 계속해서 망상에 반영된다. 집 앞의 그네는 망상 속에서 누군가가 이사를 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것으로 바뀌고. 학교에서 자신을 깔보던 여학생들은 털시 타운 아이스크림 가게의 기분 나쁜 직원으로 바뀐다. 학생들의 뮤지컬 연습은 젊은 제이크가 뮤지컬 팬인 것으로 그려지고, 식사를 하며 봤던 촌스러운 영화의 여주인공의 얼굴은 잠시 여자 친구의 얼굴에 반영된다.

찰리 카프먼의 영화에서 액자식 구성은 자주 활용된다. 이야기 안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인간 안에 다른 모습의 인간이 존재한다. 망각 그 건너편엔 사라지지 못하는 기억이 남아있다. 그의 영화에서 내면을 묘사할 때 주변은 어둡고 차가운 분위기를 띈다. 꿈이나 기억의 질감은 그러하다고 감독은 생각하는 것 같다. <이터널선샤인>에서 기억을 지우러 다니는 장면들이 그랬고, <아노말리사>에서의 꿈 장면도 그랬다. <어댑테이션>의 후반부인 헐리웃 방식으로 가공된 이야기를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의 액자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액자 안의 액자, 그 안의 액자, 그 안의 액자... 로 무한하고 부조리한 반복된다. 제이크가 버린 아이스크림 컵이 쌓여있는 쓰레기통을 보면 단 한 번의 망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독은 이러한 구성을 통해 현실에선 닿을 수 없는 인간 내면의 더 깊고 어두운 우물에 영화는 닿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안에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이 담겨 있을 지라도 말이다. 우울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 영화는 그 내면에 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가치를 지닌다. 자신의 깊고 어두운 우물을 발견한 다음에 취할 행동은 각자의 몫이 되겠지만 말이다.



thing 4. 눈의 색


눈은 아름다워 보인다. 하얗고 차분하고 가볍게 떨어지는 눈. 여자 친구는 혀를 내밀고 차분히 떨어지는 눈을 받아먹기도 한다. 하지만 눈은 점점 거세진다. 주위의 풍경을 가리고 세상의 색을 없앤다. 영화의 후반 고등학교로 향하면서 젊은 제이크는 모든 것은 색채를 띤다고 말한다.

‘기분이나 감정, 과거 경험 때문에 객관적인 현실이란 없는 거야. 우주엔 색이 없잖아. 뇌에만 있는 거야...’

영화에서 보이는 뇌 속의 세계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해가 지면서 마치 우주처럼 점점 색을 잃고 있다. 화면은 너무 어두워져 배우들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색이 없는 우주엔 생명이 없다. 어둡고 끝없는 고요한 죽음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결국 눈은 모든 것을 덮는다. 온 세상의 색이 가리어진다.

의상과 배경의 색도 영화의 진행에 따라 변한다. 영화의 초반 제이크 집의 벽지와 여자 친구의 겉옷의 색은 따뜻한 붉은 빛을 띤다. 영화의 후반부 고등학교와 여자 친구의 겉옷은 파란색을 띤다. 뜨끈하고 끈끈한 피가 몸에 흐를 때의 붉은 모습에서 생명이 사라진 싸늘한 주검의 푸른색으로의 변화와 같다. 죽음이 일어난 후 세상은 눈에 덮이고 어떠한 색도 없는 하얀색으로 돌아간다.


출처 - 구글


thing 5. 가지 않아도 돼요.


털시 타운 아이스크림 가게에는 직원 3명이 있다. 두 명은 일을 하기는커녕 제이크를 흘겨보며 비웃고 나머지 한 명은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여자 친구에게 건넨다. 그녀는 늙은 제이크가 학교에서 봤던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여자 친구가 가려할 때 이상한 말을 꺼낸다.

‘걱정 돼요...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니스 칠 아니에요. 그래서 냄새나는 거 아니라고요... 안 가도 돼요... 시간 속에서 앞으로, 당신은... 여기 있어도 돼요.’

가게에서 나는 냄새는 니스가 아니라 돼지의 몸을 구더기가 갉아먹어 썩게 한 것처럼 늙은 제이크의 내면이 썩어가는 냄새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시간 속에서 앞으로 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 세계의 룰을 어겼다(?). 달리 보면 그녀는 늙은 제이크의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늙은 제이크는 자신의 망상 속의 인물들을 창조해내며 이야기를 끌고 갔지만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 친구가 제이크의 부모님 댁에서 계속해서 집으로 돌아가고자 시도하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인물들은 늙은 제이크를 죽음에서 구해내고자 한다. 하지만 한 번 찾아온 죽음에 대한 아이디어에서 늙은 제이크는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thing 6 무용 / 뮤지컬


복도에서 보았던 무용을 연습하던 학생들은 망상 속에서 그가 창조하는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수가 된다.

젊은 제이크와 여자 친구는 만나서 사랑을 했고 결혼을 한다. 그들이 키스를 하려고 할 때 관리인 옷을 입은 무용수가 나타나 제이크 무용수와 다툼을 벌인다. 관리인은 그들이 사랑하지 못하게 막고 젊은 제이크를 죽인다.

늙은 제이크는 결코 여자 친구와 시작조차 못했던 사실은 망상에서 허용하지 않는다. 사랑은 했지만 관리인으로 일해야 했던 현실이 그 사랑을 가로막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뮤지컬은 망상의 대단원이다. 이 장면은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마지막 장면을 패러디 한 것으로 보인다. 제이크의 어릴 적 방에 <뷰티풀 마인드> DVD가 있었다. 죽음 바로 직전의 망상에서 그는 이루지 못한 것이 없다. 노벨상을 받았고 사랑하는 부모님과 여자 친구는 박수갈채를 보낸다. 모든 이가 그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제이크는 눈물을 흘린다. 누가 봐도 연극 분장을 한 가공된 장면으로 보여진 마지막 장면은 현실이 아닌 연극이기에 더 씁쓸하게 다가온다.


출처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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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글


추신 - 며칠 전 친구에게 영화를 언제부터 그렇게 좋아했냐는 질문을 받았다. 영화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지만, 그 질문은 내가 영화를 과하게 많이 보는 것 같기에 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최근 많이 보긴 한다. 꽤나...? 영화를 많이 보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다른 창작을 위해서, 영화를 순수하게 사랑해서, 연기를 위해서 등등. 다 맞는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근원적 이유는 외로움이 아닐까 싶다. 지독하게 외로울 때 영화는 도움이 된다. 나는 자주 지독하게 외로우니까. 구원은 못된다.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다. 난 그저 도움을 받는다. 책이나 음악이나 영화에게. 그들이 건네는 농담 한마디에. 그것이 구원은 못되기 때문에 끝없이 반복된다. 채워지지 않는 독과 같이. 시지프스에게 내려진 벌과 같이. 나도 언젠가 그만 끝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영화의 끝과 같은 걸 얘기하는 건 아니다;;) 순수한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내가 행하고 있는 모든 반복들이 내 마지막 상상 속 뮤지컬을 풍성하게 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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