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
홍상수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한편으론 매우 쉽다.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렇다.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될 수도 저것이 될 수도 있는 그런 모습이다. 그의 영화를 난해하고 모호한 메타포로 가득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일상의 현실을 아주 단순하게 카메라에 담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둘 중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니겠지만 어떤 것도 정답이 될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홍상수라는 이미지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의 그를 둘러싼 이슈들이 그런 오해를 더 거대화시키는 것을 부정할 순 없겠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어쨌든 그는 그 이미지 또한 영화의 소재로 활용한다.
직업인으로서의 홍상수는 정말 성실하다. 한 해에 2 작품 이상씩 꾸준하게 영화를 찍어내는 그의 작업 방식 또한 그가 영화매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말해주는 듯하다. 그가 바라보는 영화와 삶의 관계는 어떠할까. 그에게 둘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보인다. 삶이 영화를 만들고 영화가 삶을 만드는 끝없이 반복되는 우로보스적인 세계. 그의 시간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끊김 없이 영화를 찍을 수밖에...
하나의 단단한 세계관 속에서 그의 영화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이라 할지라도 어제와 오늘은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내일도 비슷한 날이 반복될 것을 알지만 의미 없는 기대를 하는 인간처럼 나는 그의 영화를 항상 기다리게 된다. (다른 이유로,, 그는 제목 짓기의 달인이라 제목을 보면 도저히 그 영화를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대체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때문에 고통 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존재는 너무나 가벼워서 당장 눈앞의 욕망에 흔들리며 무너지고 그 모든 것이 지난 다음에 후회하거나 깨닫는다. 하지만 그 깨달음 뒤에도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대체로 찌질한 남자들의 모습으로 영화에서 그려졌고 그것이 홍상수가 바라보는 세계의 부조리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존재의 가벼움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이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의 영화는 조금씩 달라졌다. ‘죽음’이라는 테마가 등장한 것인데, 그의 초기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이후 아주 긴 시간이 흘러 죽음의 테마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상옥(이혜영)은 죽을병에 걸렸다. 6개월 정도 살 수 있다고 한다. 당장 신체의 고통은 없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있기에 자신의 얼굴 앞의 모든 것이 소중하다. 과거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지금.
‘지금 내 얼굴 앞에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감사합니다... 맛있는 거 먹고 잘 보내겠습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있기에 하나하나의 모든 것이 소중하고 가치 있다. 그녀는 죽음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과거의 상옥과는 달라졌다.(과거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과도 달라졌다) 예전에 그녀는 한국을 갑자기 떠날 때 눈앞의 욕망에 충실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가족들을 떠났고 하던 배우 일도 그만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동생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았고 돌보지 않았던 가족들과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게 된다.
그것들은 지금 내 얼굴 앞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어린 모습만 기억하던 조카는 어느덧 자신보다 키가 훌쩍 커버린 어른이 되었고 어릴 적 살던 이태원의 집은 개조되어 가게가 되었다. 어릴 적엔 커보였던 정원도 이제는 작아 보인다. 다른 욕망 때문에 소홀했던 연기도 다시 하고픈 마음이 든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에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다.
과거의 자신이 반짝이던 시절을 기억하는 영화감독(권해효)을 만난 상옥은 끊임없이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그들은 술을 먹는다. 감독은 그녀에게 영화를 제안한다. 이때 상옥은 활짝 웃으며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해 함께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감독은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보다 더 큰 감정적 동요를 하고 눈물을 터트린다. 그리고 감독은 삶이 얼마 남아있지 않은 그녀를 위해 단편영화를 찍자고 제안한다. 그녀는 수락한다. 죽음 앞두고 소중한 선물을 받은 것 같다. 갑자기 비가 온다. 그들은 가게를 나서고 슬퍼하는 감독을 그녀가 위로해준다.
그녀는 동생의 집 거실에서 잠이 깬다. 어제의 일이 마치 꿈만 같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비겁한 현실이라는 것을 감독에게서 온 문자메시지가 알려준다. 그가 어제의 약속이 애초에 이뤄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고 말하고 그녀의 남은 삶을 응원한다고 이른 아침에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한 여름밤의 꿈처럼 어제의 모든 일은 사라졌다. 과거가 되어버린 그 순간은 그녀의 얼굴 앞에 남아 있지 않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비겁함에 화가 났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녀는 한바탕의 웃음을 터트린다. 참 재밌다. 그래... 삶이란 이런 가벼움으로 가득 찬 것이었지... 지나가면 모든 게 꿈처럼 되어버리는. 그러니까,,, 지금 내 얼굴 앞의 것이 소중한 것이지,,,라고 그녀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어제의 현실은 꿈과 다를 것이 없다.
그녀는 깊게 잠들어 있는 동생의 곁으로 다가가 다정하게 물어본다.
‘정옥아... 정옥아. 무슨 꿈을 꾸니’
잠들어 꾸는 꿈도, 지나가버린 어제도 낮 12시가 넘으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다가오는 오늘도 오늘로서 살아내야 하고 다음 날이면 오늘의 현실도 꿈이 될 것을 알게 된다. 마치 오늘은 삶이고 어제나 내일이나 꿈은 영화 같아 보인다. 홍상수가 그렇게 반복되는 창작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득 그를 응원하게 된다. 어느새 현실은 픽션이 되어있다.
상옥은 이전 홍상수 영화와의 인물과는 다르게 죽음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인물이다. 결국은 삶의 가벼움에 웃음을 터트리지만. 그녀 외의 사람들은 여전히 참을 수 없이 가볍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속에서 죽음을 등에 지고 얼굴 앞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혜영 배우의 죽음이 드리워진 쓸쓸한 얼굴과 전에 볼 수 없었던 천진한 웃음이 그 무게와 다짐이 얼마나 큰 지 짐작하게 한다. (여담으로 이혜영 배우의 호연에 덧붙여 세계에서 트렌치코트가 가장 어울리는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인트로덕션>(서문)으로 그의 영화의 새로운 막을 알리고 난 다음 첫 영화다. 촬영은 오히려 <인트로덕션>보다 앞서지만 앞선 다른 영화와의 차이로 보아 새로운 챕터의 이야기로 봐야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는 현재를 살아가는 감독이고, 지나간 어제는 그저 꿈과 같은데 말이다. 그는 지금 얼굴 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으로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다시 삶을 산다. 그의 다음 영화 소식이 또 들려온다. <소설가의 영화>. 흑백영화다. 이혜영과 김민희가 등장한다. 그의 삶과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태도 때문에 다음 영화를 또 기대하게 된다. (제목의 작명 솜씨 또한 또한 마찬가지다...)
요즘 문득 나도 나이가 꽤나 들어버린 것을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동시에 내 삶을 만들어온 그 과거들이 소중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낱 가벼운 꿈에 지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는 지나온 내 삶 앞에, 내 얼굴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얼굴 앞에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겠다. 그리고 진실 되어야겠다. 오늘도 좋은 것을 보고 주어진 것을 맛있게 먹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마주한 것들을 소중히 기록하고 그 세계를 사람들에게 말해주어야지. 그것이 나를 창작자로 기능하게 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이겠지. 내 얼굴 앞에 마주하는 것들을 모두 진실되게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