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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헤어질 결심.

불안은 사랑의 현기증

by 피스타치 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얼굴들이 있다.
나에겐 소년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은 나이 든 남자의 얼굴과 엄마의 얼굴을 너무 일찍 가져버린 여자의 얼굴이 그렇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소년과 엄마의 얼굴을 발견할 때 사랑에 빠진다. 이것은 내 편견임이 분명하지만, 특히 사랑에 관한 이야기에서, 남자는 소년으로 돌아가고 여자는 엄마로 성장한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경우 남자가 한걸음 느린 것처럼 보인다. 여자의 마음을 뒤늦게 알게 되는 남자는 회한에 빠져 그리워하고 괴로워한다. 누군가에겐 그 역할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이성이든 동성이든 또는 다른 형태의 사랑 안에서도 소년과 엄마의 역할이 분배되는 것 같다.

일례로 <헤어질 결심>의 각본을 쓰면서 박찬욱 감독이 유일하게 참고했다는 영화인 데이비드 린의 <밀회>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일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자 여자 주인공의 눈빛이 변한다. 그녀는 순간 사랑에 빠졌고 중년의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갑자기 젊어 보이시네요... 어린 소년 같아요...’ 그 말은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와 결코 다르지 않다.

박찬욱의 전작인 <아가씨>도 그러지 않았나. 숙희와 히데코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어떠한가. 엄마가 없는 둘은 서로에게 엄마가 되어주고자 했고 서로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발견했다. 역시 그녀들도 엄마의 발견으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나.

그러니까 소년을 얼굴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박해일과 어머니의 얼굴을 일찍 가져버린 탕웨이가 등장하는 멜로극을 나는 보기 전부터 이미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박찬욱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로맨틱한 영화를 찍는 로맨티시스트 멜로 감독이다.

감독은 정훈희의 <안개>로 시작하고 송창식, 정훈희의 <안개>로 마무리되는 영화를 만들면 멋지겠다는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헤어질 결심>을 구상했다고 한다. 여자가 홀로 부르는 <안개>에서 여자와 남자와 함께 부르는 <안개>로 마무리되는 이야기. 노래의 가사처럼 이미 지나간 사람을 생각하며 안개 자욱한 거리를 홀로 걷는 사람이 하나에서 둘이 되는 이야기. 무엇 하나 명확하게 알아볼 수 없는 안개 자욱한 이야기. 그러니까 <헤어질 결심>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호한 것에서 본질을 발견하는데 특기를 지닌 박찬욱 감독이 그려낸 ‘안개’ 그 자체인 영화다.

영화는 내내 두 가지 이미지나 개념을 대비하며 진행된다. 산과 바다, 안개와 태양, 파란색과 녹색, 완결과 미결, 구소산과 호미산, 질곡동 사건과 구소산 사건, 한국어와 중국어, 사랑과 붕괴, 운동화와 구두, 초밥과 핫도그 등등. 이야기의 맥락 안에서 어떤 것이 진실에 가까운 지 관객은 해석할 수 있겠지만 모호한 것을 추구하는 그의 세계 안에서 둘 중 하나로만 답을 내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해준(박해일)의 총성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사격 훈련 중인 그는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요즘 살인사건이 통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날씨와 살인사건이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살인사건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영화 내내 그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살인사건 그리고 잠. 그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길 바라고 사건을 해결하는 행동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 하지만 자신의 방에 붙어있는 미결된 사건의 사진들 때문에 잠에 들지 못한다. 아마 그는 삶 내내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살인 사건이 발생해야 하고 그 사건들은 계속 그의 방 한쪽에 사진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무한한 굴레 속에서 그는 폐병 환자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마르고 죽어가는 것 같다.


구소산 사건의 발생으로 해준의 삶은 연장된다. 새로운 사건은 그에게 잠을 대신할 에너지를 선사한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서래(탕웨이)와 마주하게 된다. 서래는 남편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슬퍼하거나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다. 극 후반부 해준의 표현대로 그녀는 꼿꼿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확실하고 그것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이다. 해준은 서래의 그런 모습이 흥미롭다. 그녀가 매일 저녁밥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도. 길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는 것도. 죽은 까마귀를 묻어주며 형사의 심장을 가져 달라고 말하는 것도... 흥미로움이 관심으로 바뀌고 더 깊어지는 관심은 결국 사랑이 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언제 사랑에 빠졌냐는 것은 덜 중요하다. 오히려 자신이 사랑에 빠진 것을 언제 깨닫게 되었는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해준은 언제 자신이 서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사랑하게 된다는 것. 그는 그녀가 똑바로 보는 사람이라서 좋다고 고백했다. 취조 중 남편 사체의 모습을 말로 설명해줄지, 사진으로 보여줄지 물어보는 상황에서 서래가 사진을 택했기 때문이다. (처음 서래가 ‘설명...’이라고 할 때 해준의 조금 실망하는 표정과 서래가 다시 ‘아니고, 사진.’이라고 했을 때 만족하는 표정을 보여주는 컷들이 이 영화에 섬세함을 보여준다.) 그 이유로 그는 그녀가 자신과 같은 종족인 것 같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런가. 그는 스스로 똑바로 보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자신이 똑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항상 눈에 인공눈물을 넣는다. 똑바로 보고자 하지만 똑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눈은 항상 안개 낀 풍경처럼 뿌옇고 흐리게 보인다. 그래서 해준은 서래의 사랑도 가까이 있을 땐 알지 못하다가 그녀의 죽음 뒤에야 깨닫는다. 그러니까 그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는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서래는 언제 자신이 해준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1부의 마지막, 해준이 서래의 살인을 알게 되고 그녀의 집에서 헤어질 결심을 했던 때. 서래는 그때 해준이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해준이 ‘여자 때문에 일을 망쳤죠...’라고 심각하게 말할 때 서래의 설레는 표정을 잡아주는 컷은 앞에서 사진을 골랐을 때 해준의 모습과 겹친다.)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서래의 마지막 말은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라는 말이지 않을까.

서래는 해준을 매일 잠들 수 있게 해주는 존재를 꿈꿨다. 해준이 편안한 잠에 드는 것은 영화에서 딱 3번 나온다. 첫 번째는 해준이 서래의 집을 서성이며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는 잠복에서 자기도 모르게 차안에서 잠이 든다.(쌍안경으로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지만 마치 옆에 있는 것 같이 연출되어 있다) 두 번째는 전반부 부산에서 서래가 그의 집에 찾아와 사건의 사진들을 불태우고 그를 재워주는 순간(그녀는 그와 호흡을 맞추고 바다 깊은 곳을 상상하게 한다. 감독은 이번 영화에선 섹스신이 없다고 했지만 오히려 더 섹슈얼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이고 세 번째는 후반부의 이포에서 해준이 서래를 피의자로 호송하는 경찰차 안에서다.(둘의 손은 수갑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수갑이 없었어도 둘의 손은 포개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잠을 자게 해주는 사랑은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 현실에서 해준은 결혼을 한 유부남이고 서래는 남편을 죽인 살인자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선택한 방식이 바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을 영원한 미결 사건으로 만드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서래의 마지막 선택의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해준을 위해 서래가 ‘희생’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전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앞서 내가 말했던 엄마의 개념 또한 흔히 알고 있는 ‘희생’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이 영화에 나오는 서래는 희생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주체적인 인물이다. 서래는 자신 때문에 붕괴된 사랑하는 사람을 복원하기 위한 목표를 세웠다. 그것이 그녀가 사랑하는 방식이다. 죽은 까마귀를 묻어주며 소원을 빌었던 것처럼 자신을 묻으면서 그가 복원되기를 빌었을 것이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그녀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에는 이상하리만치 두려움이 없다. 그녀는 어떤 때는 육지이고 어떤 때는 바다인 장소에 구덩이를 파고 자신을 묻는다. 그의 곁에서 잠을 선물하는 사랑은 현실에서 불가능하지만(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자신의 산이라고 믿고 있는 호미산처럼 서래는 해준을 현실적으로는 아니지만 자신의 사랑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다.) 그에게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사건이 되는 것으로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게 될 것이다. 밤새 잠 못 이루고 자신의 사진만 보라는 말처럼 절절한 사랑 고백이 있을까. 그렇게 서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붕괴된 해준을 스스로 영원한 미결 사건이 되는 것으로서 복원한다. 잔인하면서도 단일한 그녀의 사랑방식은 영화가 끝나고도 관객의 마음 한켠에 생경하게 남아 낯선 감각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결국엔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그녀의 사랑 방식을 애처롭게 응원하게 되리라. 해준은 뒤늦은 깨달음 뒤에 소년이 된 것처럼 투정 부리듯 그녀의 이름을 외친다. 그녀가 묻힌 모래 위에 서서 아무것도 모른 채 그는 늙어갈 것이다. 영원히 그녀를 기억하면서.

키에르케고르가 불안에 대해서 그랬던가... 인간은 절벽 앞에서 서서 두 가지 공포를 경험하는데, 바로 떨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와 떨어지고 싶은 충동에 대한 공포다. 여기서 두 번째 공포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선택의 자유는 인간에게 맡겨져 있고 바로 그 자유 때문에 불안이 생긴다고 그는 말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는 것이다. 서래는 그 자유의 현기증 앞에서 스스로 어떠한 선택을 했는가. 누군가를 밀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객체에서 자신이 떨어질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주체로 변하지 않았는가. 선택의 자유가 없던 것에서 선택의 자유를 가지는 주체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그녀는 호미산에서 해준을 밀어버리는 것(그 전과 같은 선택)이 아닌 자신을 떨어뜨릴 생각을 한다. 낭떠러지보다 더 아래로 자신을 깊숙하게 내던질 선택. 인간으로서 자유의 주체자로서 사랑의 행위자로서 그녀는 스스로의 몸을 묻어버리는 선택을 했다.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에서 이것은 얼마나 자유로운 선택인가. 우리가 마지막 장면에서 받는 충격의 이유는 잔인하지만 그만큼 그녀의 선택이 아름답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 점에서 서래는, 탕웨이는 오랫동안 기억될 인물이자 배우다.

칸에서의 첫 공개 이후 히치콕의 <현기증>이나 왕가위의 <화양연화>와의 연관성을 그들은 강조했지만 영화를 본 나는 두 영화가 많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큰 빚을 진 작품이라는 게 내 의견이다. 안개 가득한 무진과 이포의 모습은 공간이 주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감각 때문에 더 비슷하게 느껴진다. 영화화된 <무진기행>의 주제곡도 <안개>였다. 혹시 영화를 더 깊이 느끼고 싶다면 <무진기행>을 오랜만에 펼쳐보는 것을 추천하겠다.

<헤어질 결심>은 글에서 언급된 것 외에도 곱씹을 거리가 넘치는 영화다. 큰 이야기보다 디테일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감독의 작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가 영화적이라는 점이 나에겐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으로 다가왔다. 물론 어떤 메시지가 담긴 영화가 좋은 영화일 수도 있지만 메시지에 앞서 영화적 미학이 단단한 영화는 실로 오랜만이다. 박찬욱의 영화는 나에겐 전부 멜로 영화였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멜로를 만들어주어 나로선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도 있고,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거지.'라는 영화의 대사처럼 <헤어질 결심>은 어떤 때는 파도처럼 어떤 때는 서서히 퍼지는 잉크처럼 계속 곱씹게 되는 영화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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