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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미나리

어디서든 뿌리내리는 미나리의 마법처럼.

by 피스타치 유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미나리는 어디서나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미나리>는 뿌리내리는 것에 대한 영화다.

미국이라는 낯선 곳에. 삶이라는 평야에. 가족이라는 물가에.

우리는 미나리처럼 뿌리 내릴 수 있을까.

지루한 표정의 데이빗(앨런 김)이 보인다. 캘리포니아를 떠나 아칸소로 오는 먼 길을 내내 그는 그런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관했을 것이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은 엄마인 모니카(한예리)의 얼굴에는 드러나지만 그에게선 찾아볼 수 없다. 덜컹거리는 차의 소음 위로 점점 크게 울려오는 데이빗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그 소리에 집중하고 있다. 생명의 징검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다음 심장 소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다음 심장 소리가 멈출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품고서. 영화 중반부의 극적인 밤, 데이빗은 할머니(윤여정)에게 죽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 그러니까 차 안에서의 지루해 보이는 얼굴은 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얼굴이었다. 그 어떤 것도 죽음의 두려움 앞에선 고개를 숙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두려움은 아직 무의식에 영역에 있다. 죽음에 대한 감각을 이 아이는 상상만 해봤지 체감한 적이 없다. 그 무의식 안의 두려움 때문에 그는 잠들 때마다 ‘브로큰 딩동’ 현상으로 이불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는 어떤 소음보다 크게 들리는 심장 박동 때문에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린 데이빗은 벌써부터 죽음의 날을 매일 매 순간 맞이하고 있다. 그 심장 박동의 울림은 영화를 보는 이들의 어릴 적 기억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 같이 들려오기도 한다. 기억의 문이 열리고 우리는 뒷걸음질로 문을 통과해 묻어둔 과거의 나와 가족들과 마주한다. <미나리>는 데이빗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두려움을 항상 품고 살아온 우리의 어릴 적 세상을 보편적으로 펼쳐낸다.

출처 - 네이버영화

차에서 내린 제이콥과 모니카의 표정이 엇갈린다. 제이콥은 넓게 펼쳐진 평야와 기름진 땅을 보며 이곳에 빅가 든을 만들 것이라 당차게 선언한다. Jacob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야곱이라고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식량이 부족했던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훗날 이집트로 이동하여 풍족한 만년을 누렸던 것처럼 제이콥 또한 아칸소에 자신의 가족들이 풍족하게 뿌리내릴 수 있는 지상 낙원(Garden of Eden)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니카는 달랐다. 그녀는 엄마로서 아들의 심장병과 당장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 이루어지지 않는 남편의 꿈을 그녀는 너무 많이 참아왔다. 그녀에게 아칸소는 그저 평야로 가득 찬 시골일 뿐이다. (실제 아칸소 주 일대는 ‘힐빌리’라 불리며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전형적 시골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가족에겐 영화에서 설명되지 않는 두 번의 이동이 있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아칸소로. 한국에서 그들은 ‘사랑해’라는 노래를 즐겨 부르는 다정한 한 쌍이었고 미국으로 가서 서로를 구해주자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 옛날의 기억은 이미 사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해’라는 노래를 자주 불렀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그 기억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의도적인 망각이 그들이 낯선 땅에 뿌리내리는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망각으로 인해 서로보다 자신을 구하는 일이 먼저가 되었다. 자신이 뿌리내리지 못하면 누군가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아마 첫 번째 이동을 통해 알 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자신이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이콥은 농장을 성공해야 하고, 모니카는 병아리 감별의 속도를 올려서 가족을 돌봐야 한다. 그렇게 두 번째 이동이 시작되었고 각자의 일을 하는 그들을 대신해서 할머니가 아칸소에 도착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아요.’

‘할머니 같은 게 뭔데?’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 순자가 왔다. 아이와 고스톱을 치며 욕을 하기도 하고 교회에 낸 헌금을 다시 슬쩍 가져오기도 하는 할머니. 데이빗이 간밤에 싼 오줌을 보고 ‘브로큰 딩동! 딩동 브로큰!’ 하고 놀리는 할머니. 남자아이에게 ‘프리티 보이’라고 하는 할머니. 레슬링 중계를 즐겨보는 할머니. 뱀을 보고도 쫓아내지 말라고 하는 할머니. 산속에서 내려온 이슬(마운틴 듀)을 좋아하는 할머니. 어느 하나도 데이빗의 눈에는 할머니가 할머니 같지 않다. 그런 할머니는 터 좋은 물가에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를 심는다. 미나리는 한국이든 미국이든 상관없이 어디서든 잘 자라난다. 할머니 또한 미나리처럼 어디서든 자신의 행동을 하고 주눅 들지 않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고로 할머니가 미나리 그 자체다.

제이콥의 농장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 위기를 맞이한다. 농장에 공급되는 물이 끊어진 것이다. 많은 예술 작품에서 그런 것처럼 <미나리>에서 물은 생명과 직결된다. 반대로 불은 죽음과 맞닿아있다. 농작물들은 물 부족으로 인해 말라가고 점점 썩어간다. 다급한 제이콥은 집으로 공급되는 물을 농장으로 끌어다 쓰는 선택을 하는데, 그때부터 가족들은 마치 농작물들처럼 피폐해지기 시작한다. 집에 물이 끊기고 궁여지책으로 할머니와 아이들은 미나리를 심은 물가에서 물을 길러다 생활수로 사용하기에 이른다. 모니카는 말라가는 가족들을 더 이상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녀는 제이콥과 이별할 마음을 서서히 품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극적인 밤이 찾아온다.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 살갗에 떨림으로 찾아오는 밤. 데이빗은 할머니에게 죽기 싫다는 고백을 하고 할머니는 데이빗을 꼭 안아주며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미나리... 미나리... 원더풀... 원더풀..’ 하고 읊조린다. 아득하고 캄캄한 밤이 지나고 눈을 떴을 때 데이빗은 이불의 오줌을 확인한 뒤 자신의 바지를 확인한다. 이불의 오줌은 할머니의 것이었다. 할머니의 몸은 굳고 눈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할머니는 데이빗의 두려움을 가져갔고, 데이빗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물(생명)을 멈추게 했다. 이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두려움의 전달은 데이빗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빼앗아가고 생명을 선물했다. 그 뒤 할머니는 죽음의 두려움에 시달린다. 데이빗에게 상처를 냈던 서랍장을 보고 폭탄을 피해야 한다고 말하며 과거 겪었던 전쟁의 두려움을 떠올리기도 한다. 영화는 누군가를 살려내는 일은 누군가의 두려움을 짊어지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세상이 만약 제로섬 게임이라면 내가 가진 두려움을 짊어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가족뿐 일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가족이 된다는 것은 마냥 행복한 일이 아니다. 상대의 두려움을 내 두려움으로 만들 수 있는 것. 역설적이게도 두려움의 공유가 사랑으로 피어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병원과 한인마트를 다녀온 뒤 모니카는 제이콥에게 꿈과 가족 중 선택을 하라고 이야기한다. 둘은 누구도 물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곧 헤어질 것처럼 보인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서로의 짐을 싸기만 하면 된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농작물 창고에 불이 난 것이다. 그 불은 물이 공급되지 못하고 해체를 앞에 둔 가족이 죽음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그 죽음의 불 앞에서 남은 농작물과 제이콥의 꿈과 모니카의 희생과 가족의 생명과 사랑이 뒤섞인다. 불은 태울 수 있는 것을 모두 태우면 사라진다. 거기엔 제이콥과 모니카만이 서로를 품으며 하나가 되어 남아있다. 한편 다른 쪽에서 두려움에 떠나려는 할머니를 잡기 위해 데이빗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뛰기 시작한다. 이제 데이빗에게 남아있는 두려움은 없다.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서 잠이 든다. 할머니는 가족이 함께 누워있는 모습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가족은 미나리처럼 뿌리를 내렸는가. 미국의 땅에. 아칸소에. 농장에. 교회에. 이 가족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뿌리를 내렸다. 네 개의 뿌리는 서로를 향해 뻗었고 그 뿌리는 얽혀서 다시금 자리를 찾으려 한다. 마지막 할머니의 표정은 아직 그 여정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할머니께서 자리를 참 잘 고르셨다.’

할머니는 미나리와 같다. 그것은 생명력 그 자체다.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란다. 할머니가 부르는 미나리 노래는 마치 주문 같기도 기도 같기도 하다. 어디서든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달라는 염원이 담긴. 하지만 그것이 주문이거나 기도인 것은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미나리를 되뇌면서 어디서든 뿌리내릴 수 있기를 매번 기원한다. 미나리는 그들 모두에게 응원을 보내는 영화가 아닐까.

출처 - 네이버 영화

삶을 살아갈수록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열망하면 절망하게 된다. 절망하면 그로인해 또 열망하게 된다. 이 고통의 시간은 부조리하게도 반복된다. 이젠 스스로 자라는 미나리처럼, 영화는 스스로 만들어진다고 했던 이창동 감독의 말처럼, 시가 시를 쓰고 삶이 삶을 산다고 했던 이성복 시인처럼, 우리는 사랑의 숙주이고 사랑은 우리 몸에 기생한다고 했던 이승우 작가의 말처럼 나의 삶이 삶을 살아가게 사랑이 사랑을 하게 예술이 예술을 행하게 하였으면 하고. 미나리 미나리 원더풀 원더풀. 읊조려본다. 이 기도가 소망이 현실에서 이어져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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