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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테넷

원형으로 흐르는 시간

by 피스타치 유

열역학 제2법칙에서 엔트로피(무질서도)의 총량은 항상 증가하거나 일정하기 때문에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일상에서의 시간 개념이 바로 그러하다. 지나간 현재는 과거가 되고 다가올 현재는 미래라 불린다. 그것들은 시간이라는 직선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걸까.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현재만 존재하는 거라면 어떨까. 놀란은 엔트로피의 총량을 줄일 수 있다면 지나간 현재를 다시 맞이할 수있을 거라는 가정으로 <테넷>을 선보인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속성 또한 마찬가지다. 그 세계에선 절대적으로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은 사라지고 어느 방향으로도 흐를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넓고 울퉁불퉁한 밑그림을 깔아놓은 뒤 놀란은 난해하고도 명확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출처 네이버영화


<테넷>에서는 미래에서 개발된 회전문(엔트로피를 역전시키는 기술)을 통해 시간이 반대 방향으로 흐르게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테넷>이 다른 시간 여행 영화와 차별을 두는 부분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나 미래의 특정 시간으로 순간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일주일 전으로 가려면 회전문을 통과한 채 일주일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시간이 반대로 흐를 뿐 그 속도는 같다. <TENET>이라는 제목이 회문(순방향으로 읽어도 역방향으로 읽어도 ‘TENET’이다)인 것처럼 영화의 시간은 직선이 아닌 원형을 그린다. 그렇기에 인물들은 일어난 일이 일어난 곳에 항상 그리고 다시 존재하게 된다. 놀란의 이전 영화들을 보더라도 그에게 시간은 비선형적이다. 직선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휘어지고 꺾어지며 제자리를 맴돌기도 한다.


출처 네이버


놀란은 이런 원형으로 흐르는 시간을 이미지를 통해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회전문, 풍력발전의 프로펠러, 요트 운전의 페달 등을 통해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이미지화시켜 감각적으로 느끼게 하려는 시도다. 예고편에서부터 공개된 핵심적인 대사 ‘이해하려 들지 말고, 느껴라’처럼, 놀란 본인도 이번 작품의 난이도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을 넘어 원형으로 흐르는 시간이라는 테마는 이야기 자체에 스며들어 있다. 주인공은 대부분의 미션에서 실패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되돌아가서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한다. 예를 들어, 사토르의 요트에 탔을 때 캣이 사토르를 죽이려는 시도를 하는데, 기존의 작전이 실패로 결론지어지려는 순간 주인공은 이내 요트를 돌려 사토르를 살려 작전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한다.(급커브로 인해 요트가 뒤집어질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완벽한 원형의 동선을 그리며 되돌아간다.) 뿐만 아니라 극의 모든 사건은 ‘되돌아가서 바로 잡는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 놀란은 실패하더라도 그 후에 다시 시도하는 용기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의 이전 작품에서도 이러한 철학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인터스텔라>에서 인듀어런스 호를 잃을 뻔한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우주선을 되살리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고로 놀란의 세계에서 인간은 실패하더라도 한 번 더 시도하는 존재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것이 그가 바라보는 인간다움인 것 같다.

출처 네이버영화


‘일어난 일은 일어나는 거야.’

이 말은 곧 ‘운명’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인간에겐 사실 자유의지란 없기에 삶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삶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무의미하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중요해진다. <테넷>은 되돌아가서 바로잡는 이야기를 보여주며 인간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존재라고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현실세계에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회전문은 무엇일까. 놀란은 그것이 영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를 통해 과거를 떠올리고 통찰할 수 있다. 영화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말과 행동은 바꿀 수는 없지만 다시 떠올려보고 성찰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테넷>은 실패하더라도 되돌아가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어차피 일어날 일, 일어난 일은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사실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영화처럼 우리의 시간도 어쩌면 원형으로 흐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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