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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단단히 디디고 서기 위해서.

by 피스타치 유


‘인간은 엇나가버린 곰이다.’

소설 속 아메리칸 인디언 전문가인 인류학자 세르주 부샤르의 말이다. 폴은 알곤킨 인디언인 아내(위노나)를 더 잘 알고 싶어서 세르주의 책을 탐독했다. 그 당시에 이해하지 못했던 그 문장. 폴은 교도소 안에서 갑자기 그 문장을 떠올렸다. 마치 자신이 엇나가버린 곰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저지른,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사건을 떠올림과 동시에 자신의 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아내와 동일하게 자신이 곰의 후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소중한 순간이다.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 않아>의 인물들에게 성공의 순간은 없다. 그들의 삶은 실패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비극적인 그들의 삶을 실패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까. 작가는 이 비극적 삶이 행복한 모습으로 바뀌는 마법 같은 순간이 그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도 그들에게 실패의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 않아>는 폴이 교도소에서 자기 삶에 다가온 비극적 순간들(어머니의 자살/아버지의 탈선과 죽음/아내의 사고사/반려견의 죽음/세즈윅의 두 팔을 부러뜨리고 살점을 뜯어낸 사건으로 교도소에 가는 일 등)을 떠올리며 그것을 어떻게 소화하고 다음 생의 단계로 가는지를 그려내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왜 교도소에서 시작될까. 작가는 교도소를 거대한 짐승의 장기에 비유해서 표현한다. 그는 마치 곰의 장기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그곳에서 그는 아픈 기억들을 재정립하고 자신의 장기로 소화시켜야 한다. 과거를 정확히 돌아본 뒤 꼭꼭 씹어서 장기 속을 지나가게 해야한다. 그런 과정이 있어야만 과거의 비극이 소화가 되고 몸의 영양소로 바뀌어 흡수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생의 다음 단계로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여기서 한동안 지내다보면 이 건물의 신진대사에 익숙해져 어둠 속에서 교도소가 거대한 짐승처럼 숨을 쉬고, 감감이 기침을 하고, 뭔가를 꿀꺽 삼키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교도소는 우리를 집어삼키고 소화한다. 우리는 그의 배 속에 웅크린 채 번호가 매겨진 주름들 속에 숨고 위장의 경련들 사이에서 잠을 청한다.’

폴의 아버지 요하네스 한센은 덴마크 스카겐 출신의 목사다. ‘그는 모래에 묻힌 교회당, 신앙의 잔해를 보고 목사가 되겠다는 뜻을 품었다. 끝없는 의심 속에서 항해를 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던 사람, 때로는 버려진 교회의 부실한 돛에 마음이 끌리고 때로는 철로의 강건하고 모험 넘치는 삶에 매혹되었던 사람’ 이었다. 그의 아내 아나 마르주리는 프랑스 툴루즈 출신이었다. 그녀의 외조부모는 ‘르 스파르고(나는 씨를 뿌린다)’라는 작은 영화관을 운영했고 그녀는 어릴 때부터 많은 영화들을 일상으로 접했다. 후에 그녀는 그 영화관을 맡아 운영하게 된다. 그들의 가정은 툴루즈에 꾸려졌다. 남편의 목회 일과 아내의 영화관 운영 사이에는 수많은 갈등이 생겨났다. 특히 아나가 미국에서 넘어온 외설적인 영화 <목구멍 깊숙이(deep throat)>를 상영작으로 걸었을 때 한센의 자존심은 무자비하게 상처 받았다. 목사의 아내가 외설적인 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에 분노한 남편과 예술을 규정하려 하는 구시대적이고 고리타분한 목사의 말에 분노한 아내는 결국 헤어지게 된다. 그때 목사는 폴에게 진심을 고백했다.

‘나는 이제 신앙이 없다. 단 하루도 믿음을 가지고 살 수가 없구나… 이제 완성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아무것도 안 남았다. 지난번 스카겐에 갔을 때 노목사님하고 그런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눴단다. 그분이 그러시더구나. ‘이보게, 요하네스, 나도 이제 아무것도 안 남았다네. 매일 저녁 비우고 새로 꺼내는 이 스카치 병 말고는 진짜 아무것도 없어. 신앙은 약한 거야. 신앙의 토대가 마술사의 재주보다 세배는 더 허망할 걸. 좋은 마술가가 되려면 뭐가 필요하지? 토끼와 모자가 있어야 해. 어떤 시대에는 내 손에 그게 다 쥐여있었어. 그런데 이제 토끼도 없고, 모자도 없고, 마술도 없어,’ 그래, 바로 그렇단다, 아들아. 정말 아무것도 안 남았다…’

사실 목사의 <목구멍 깊숙이>에 대한 분노는 신앙이 사라진 자신에 대한 분노 였을지도 모른다. 예술이 밀려 들어오는 시대에 자신이 쥘 도구가 없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 허망함을 앞세워 아내와 아들을 떠나 캐나다의 셋퍼드 마인스로 간다. 어머니의 냉정함에 정이 떨어진 폴 또한 아버지를 따라 셋퍼드 마인스로 떠난다.

셋퍼드 마인스는 지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석면으로 이루어진 도시다. 그곳의 일꾼들은 고립된 도시에서 석면을 캐는 일 하나에만 사용되고 있다. 작은 규모의 마을 안에서 종교는 다시금 가치를 찾는다. 의지할 곳이 필요한 사람들은 한센 목사의 설교에 마음을 다하고 매주 교회를 찾는다. 한센에게 더할 나위 없어 보이는 장소이지만 그는 결코 비어있는 자신을 채우지 못한다. 무력한 아버지가 안쓰러웠던 폴은 그를 경마장으로 데려간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목사에게 그 설득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목사는 원래의 주인 대신 경마라는 주인에 충성을 다했다. 목사는 충만해지는 자신을 느꼈고 그곳에 몰입했다. 그렇게 교회의 돈까지 쓰게 되었고 결국 도박판까지 찾게 되었다. 예술에 밀려난 종교는 이제 자본이라는 괴물에 잡아 먹혀버렸다. 어디에도 설 곳 없는 신세가 된 종교는 곧 목사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충만함이 가짜라는 걸 알았다. 다시 허망함에 사로잡힌 그는 목회 중 갑자기 쓰러지며 세상을 떠났다. 석면과 자본으로 이루어진 이 땅에 자신이 서 있을 곳이 없다는 걸 아는 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늘 헌신적이고 충직한 일꾼이었음을 알아주십시오. 비록 지금에 와서 이런 표현은 말 같지도 않겠지만요. 비록 오래전에 신앙은 나를 떠나갔지만요. 비록 여러분이 나를 위해 기도하기란 불가능하겠지만요. 여러분이 나를 심판하고 단죄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 말 한마디만 마음에 새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 단순한 말,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의 허물을 크게 보지 말라면서 늘 하시던 말씀이지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거든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폴은 셋퍼드 마인스를 떠나 몬트리올로 향했다. 그곳에서 ‘렉셀시오르’라는 건물의 관리인이 되었고 그 일을 꽤 준수하게 수행했다. 어느 날 밤 어머니의 자살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다. 그는 결코 어머니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남아있는 자로서 그 파장을 견뎌야 했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였을까. 예술이라는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본이 밀려 들어오는 영화산업에서 <르 스파르고>는 더 이상 세상에 어떤 씨도 뿌리지 못할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일까. 어머니의 죽음은 결코 아버지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폴은 자신의 땅을 잃어버린 그들의 죽음을 견뎌야 했고 자기 자신이 서 있을 땅을 찾아야 했다.

알곤킨 인디언인 위노나는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이 확실하다. 그녀는 폴의 운명이다. 폴 또한 그녀의 운명이다. 첫 만남에 서로를 그렇게 느꼈다. 그녀는 지옥의 새인 벌새를 항상 몸에 지니고 비버를 타고 하늘을 날며 하루를 인생 전체처럼 살아간다. 폴은 죽음을 항상 지니고 살아가는 그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이야 말로 가장 생생한 살아있음을 느끼는 방법이니까.

‘몸길이 5, 6센티미터밖에 안되는 새가 1분당 1260회의 심장 박동을 감당하고, 폐로 500회나 호흡한다. 벌새의 날개는 어느 방향으로나 회전 가능하기 때문에 전진과 후진, 상승과 하강에 상관없이 속도를 낼 수 있으며, 말도 안 되는 자세로 시속 100킬로미터를 주파한다. 벌새의 날개는 1초에 200회 움직이고 항상 공기방울을 머금고 있어서 자유자재로 날개 끝 와류를 일으킨다. 게다가 이 새는 허공에 가만히 떠 있는 비행, 곡예비행에도 일가견이 있고, 혈액의 적혈구가 1 큐브 밀리미터당 659만 개나 된다. 몇 그램밖에 안 나가는 몸뚱이로 8000킬로미터를 비행할 수 있으며, 하루에 여덟 번 먹고, 잠들기 전에는 체온을 10도나 떨어뜨리고 심장 박동도 1분당 50회로 대폭 낮춘다. 바로 이 지옥의 새에게 아내는 자기 목숨과 운명을 맡기고 있었다. 3그람짜리 새가 2톤 반이나 나가는 낡아빠진 비버의 계제 나쁜 양력 저하를 책임지는 셈이었다. 위노나의 벌새 모양 열쇠고리를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벌새를 믿는다는 위노나의 고백을 아버지가 들었다면, 하늘의 난리 법석에 일상적으로 단련된 인디언 여인의 신조가 쌍안경을 건 목사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고 생각했을 텐데.’

죽음에 가까이 있었던 만큼 생생한 삶을 맞이할 수 있었고, 그만큼 실제로 죽음과 가까웠던 위노나는 비행기 사고로 폴의 삶에서 퇴장했다. 남겨진 폴은 그 후에 렉셀시오르의 세즈윅과의 폭력 사건으로 교도소에 가게 되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반려견이었던 누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또 한 번 혼자 남게 되었다. 복역기간을 마치고 그는 스카겐,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땅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이 그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폴이 교도소에 간 이유가 되는 사건은 소설의 제일 마지막에서야 다뤄진다. 그것이 소설의 클라이막스일 수도 있겠지만 그 앞의 이야기에 더 무게를 실은 것에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주변에서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비극적 죽음과 계속해서 삶의 터전을 옮겨다녀야 했던 그의 삶은 외롭고 고단했지만 결국은 자신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땅을 찾아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고로 이 작품은 지금 자신이 딛고 서있는 곳이 불안정하다면 계속해서 자신의 땅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폴에게 스카겐이 종착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해서 찾아나서는 것. 그것이 이 작품에서 인간이 생존하는 방법이다. 많은 우울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추운 겨울의 교도소에서 시작하고 따뜻한 봄 햇살로 마무리 되는 이 소설은 결국은 마음 한켠에 따뜻하게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 따뜻함으로 삶의 무거움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기에 누구나의 삶은 그 모양이 어떠하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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