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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사냥의 시간.

관객을 사냥하려고 하면 어쩌나.

by 피스타치 유

개봉 전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사냥의 시간>이 결국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윤성현 감독의 전작 <파수꾼>이 도달한 깊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번 영화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더군다나 이제훈, 최우식, 안재홍, 박정민이라는 젊고 매력 있는 배우들까지 우리의 기대를 부풀렸다. 좋은 재료는 좋은 음식이 될 수 있을까? 애석하지만 전부 그렇진 않다. 좋은 음식에는 좋은 재료가 필요하기 마련이지만, 좋은 재료가 좋은 음식이 되기엔 많은 것이 충분하지 못하다. <사냥의 시간>은 그것을 정확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이제훈(준석)과 그 친구들이 있는 이곳은 고통스러운 지옥이다. 그래서 그들은 박해수(한)라는 장애물을 넘어 낙원으로 가려 한다.'

이 영화의 플롯이다. 이렇게 플롯이 단순한 작품들을 우리는 생각보다 꽤 보아왔다.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 조지 밀러의 <매드맥스>, 비교적 최근에 개봉했던 샘 맨데스의 <1917>까지. 플롯이 단순하기에 넓은 직선주로를 달리는 쾌감이 있고, 시적인 의미와 여운까지 남기는 명작들이다. 이 영화들과 <사냥의 시간>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긴 어렵겠다. 하지만 왜 우리가 <사냥의 시간>에서 장르의 쾌감과 시적 여운을 느끼지 못했는지 곱씹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가진 수많은 오류에 앞서 전반적으로 관객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플롯의 설정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첫 번째로, 지옥 같은 '이곳'에 대한 묘사다. 주인공들이 현재 이곳에서 어떻게 고통받고 있는지 묘사되는 부분이 있는가? 인물들은 대사로 '여기는 지옥이야.'를 되뇌고만 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이미지들 또한 상상력을 크게 자극하지 못한다. 폐허가 된 건물과 벽에 꽉 들어찬 그라피티들은 디스토피아적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그저 미국 할렘가에서 힙합의 자유와 표현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보일 뿐이다. 극 전체에서 조명을 사용하는 방식도 통일성이 없어 보인다. <매드맥스>에서 물을 독점한 세력 때문에 온몸이 깡마르고 기괴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칠드런 오브 맨>의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상황과 게토의 모습을 한 마을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는 많은 설명을 생략 가능하게 해 준다. 거기에 비해 <사냥의 시간>의 이곳은 꽤 살만해 보이지 않는가?

두 번째는, 낙원(유토피아)에 대한 묘사다. 이제훈이 설명하는 낙원은 그저 바다가 있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감방에서 만난 형님에게 들었던 이야기만 믿고 큰 도박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훈이 낙원으로 가고 싶은 이유는 어머니와의 어릴 적 기억 때문인데 그 역시 설명과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래비티>는 생명이라곤 없는 우주에서 지옥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낙원이었던 지구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지구는 우주와의 대비를 통해 낙원으로 비친다. 더군다나 생명이라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고 다시 살아가기 위해선 지구로 돌아가야 할 수밖에 없다. <매드맥스>에서 낙원은 물이 충분한 곳으로 설명된다. 물 역시 생명을 상징하므로 그들은 떠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훈의 낙원은 최우식(기훈)의 집이 있는 동해만 가도 사실 충족되는 것이다.(에메랄드 빛 바다가 아니라서 안 된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위의 두 가지가 영화에서 핵심적인 설정 파괴다. 그러므로 인물들에게 낙원으로 가는 강렬한 동기가 있을 리도 만무하다.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장애물을 넘을 의지도 없다. 인물들은 모두 수동적이고 도망가기 급급하다. 관객은 인물과 동화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목 뒤에 근육을 뭉치게 할 뿐이다. 뼈대가 없는 집에 아무리 화려한 인테리어를 해보았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 영화에서 많은 설정 오류들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인 플롯에 대한 헤이함은 뼈아프게 느껴진다. (뼈가 없으니 뼈가 아플 리도 없긴 하다...)

이 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또래의 젊은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그들은 아무리 발버둥처도 이 세상을 벗어나기 힘들고 기존의 힘을 가진 세력에게 도망 다니기만 할 뿐이다. 이런 설정을 돌아보면 '세대론'으로 영화를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헬조선에서 청년들이 받는 고통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세대론'의 관점을 들이밀어봐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젊은 세대들을 무능력하고 일탈하는 존재로만 그려낸 점이 그것이다. 비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젊은 세대들의 암울한 현실을 표현하려 한 것이라면, 그 세대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주변 환경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할 것이다. 감독이 영화에 그려낸 모습으로 젊은 세대를 바라보고 있다면 이미 거기서부터 오류가 발생한 것이지 않을까.

영화가 장르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긴장 만들어내는 방식 또한 단순하여 아쉬움을 남긴다. 영화에서는 관객과 등장인물의 정보의 불균형에 따라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를 만들 수 있다. 관객은 알고 인물을 모르면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저 모퉁이 너머에 위험한 인물이 있지만 주인공은 그것을 모르고 모퉁이 쪽으로 걸어가는 상황에서는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반대로 관객은 모르고 인물이 알면 미스터리가 발생한다. 인물은 어떤 동기로 행동을 하는데 관객은 알 수 없으니 궁금증이 생긴다. <사냥의 시간>에서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혼동해서 사용하고 있다. 서스펜스를 극대화해서 전투 장면 직전까지 긴장감을 최대한 상승시킨 후 짧고 굵은 전투를 찍는 것에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정평이 나있다. <사냥의 시간>은 정반대다. 서스펜스의 지속을 너무 길게 만들어 고무줄을 너무 늘여 탄성이 사라지는 게 하는 것과 같이 긴장감을 줄어들 게 만들고 전투씬의 폭발력 또한 약하다. <사냥의 시간>에서 긴장을 만드는 방식은 인물이 직접 긴장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인물이 긴장하면 관객도 자연스레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심리적 긴장이라기보단 신체적인 긴장이다. 그것은 지속력이 약하다. 관객을 놀라게 하는 신체적 긴장도 분명 필요하겠지만, 플롯이 무너진 <사냥의 시간>에서 정보를 이용한 방식의 긴장을 만들어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 같다.

최근 한국 영화에서 자주 느껴지는 기시감이 있다. 하나는 동기 없이 행동하는 인물들이다. 장르적인 장치를 이용하면 상관없다고 말하는 감독들이 없길 바란다. <사바하>에서 이정재도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사명감으로 목숨을 걸며 진실을 밝혀내려 한다. <사냥의 시간>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유 없이 목숨을 걸고 이유가 있더라도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다. 그것이 현실의 동기든 미학적인 유혹이든 무언가는 필요해 보인다. 또 하나는 해외 명작 영화의 캐릭터나 장면을 따라 하는 것이다.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일 수 있으나. 모방이 낳은 창조를 가져다 써야지. 어머니인 모방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 어쩌자는 것인가. 특히, 악역 박해수(한)의 모습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안톤 시거를 너무나 연상시킨다. 안톤 시거는 그 영화에서 냉정한 킬러이면서도 '우연'이라는 개념을 인격화 시켜놓은 희대의 캐릭터다. 그대로 다른 영화에 넣는다고 해서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사냥의 시간>의 엔딩 장면의 편집이나 음악 또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시그니처 엔딩 장면을 보는 듯하다. 고조되는 음악, 인물의 내레이션. 그리고 새로운 의지를 표명하면서 끝나는 방식. 이런 식의 모방은 창조라고 할 수 있을까. 사냥의 주체는 누구이며 그 시간은 어떤 공간에 어떤 방식으로 흘러갔는지 알 수 없는 제목 짓기 또한 아쉬움을 남긴다. 결국 남은 것은 '혜자 했다'라는 말을 대체할 '넷플릭스 했다'라는 한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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