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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안나 카레니나 / 레프 톨스토이 작

죽음의 아름다움으로부터의 유혹.

by 피스타치 유

'안나 카레니나는 왜 자살했는가?'

밀란 쿤데라는 산문집 <커튼>에서 이렇게 물었다.
내용을 따라가보면 그녀가 죽음을 선택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브론스키라는 사랑을 얻으면서 자신에게서 멀어져 간 주변 사람들. 만날 수 없게 된 아들 세료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온전하고 사랑받는 삶. 고통받고 고통받다가 사랑을 하는 법 또한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 그녀는 사랑받지 못하면서 결국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앞의 질문은 무슨 의미를 지닐까?

쿤데라의 대답은 이렇다.
'플랫폼에서 우연히 그녀는 갑자기 기억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사랑 이야기에 아름답고 완전한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기회, 다시 말해 역이라는 동일한 무대와 열차 바퀴에 깔려 죽는다는 동일한 모티프에 의해 연애의 시작과 끝이 연결될 수 있는 기호에 매료당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의식하지 않지만 아름다움의 유혹 아래서 살아가며, 안나는 존재의 추함에 숨이 막힐 것만 같기에 더욱더 이러한 유혹에 민감해졌기 때문이다.'
- <커튼>, 밀란 쿤데라

죽음의 아름다움. 그것으로서 현실의 추함과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안나는 현실의 고통 때문에 충동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기차로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후 두 번의 시도 끝에 성공한 것을 보고 추측할 수 있다. 첫 번째 시도에서는 손에서 놓으려고 했던 빨간 손주머니가 그녀를 붙잡았으므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것은 작가 또한 그녀의 선택에 연민을 느끼고 한 번은 말리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녀의 결심은 확고했다. 죽음으로서 완성되는 그 무언가를 향해 그녀는 뛰어든 것이다. 그녀는 성호를 그었고, 처녀 시절과 어렸을 때의 일련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해수욕을 하면서 마악 물속으로 뛰어들려고 할 때 여러 차례 경험했던 것과 흡사한 느낌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완벽한 균형과 아름다움을 위해 다가오는 차량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바퀴와 바퀴 사이의 한가운데가 그녀 앞까지 온 바로 그 순간, 수영을 하기 위해 바다에 다이빙을 하듯 아름답게 뛰어들었다.

'그녀는 빨간 손주머니를 내던지고 두 어깨 사이에 머리를 틀어박고 두 손을 짚고 차대 밑으로 넘어졌다.'

그녀의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되었다. 문학적 균형을 넘어 삶과 죽음의 균형, 추함과 아름다움의 균형, 증오와 사랑의 균형, 죄와 벌의 균형까지. 되돌아보면 그녀의 죽음은 불가피했고, 그 죽음으로 인해 어찌 보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작가는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다. 8장에 이어지는 콘스탄틴 레빈의 모습이 남아있다. 안나가 죽음으로 생명을 부여한 그 이야기를 모두 바라본 레빈이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질문을 던지고 깨달음을 얻는다. 여기서 레빈은 아마도 작가이면서 독자일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사랑과 죽음을 지켜봤고, 그 죽음의 아름다움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코로나 19 덕분에(?) 벼르고 있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디자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한 권으로 통합된 10주년 기념 특별판을 구입했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매료는 위험한 것이었던가. 가독성을 위해서라면 추천하지 않는다. 무려 1500페이지 이상의 책을 펼쳐서 읽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영화와 공연으로만 접했던 안나 카레니나를 원작으로 접하고 완독해 매우 뿌듯하다. 톨스토이의 솜씨 덕분에 두꺼운 책이었지만 즐겁게 볼 수 있었다.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이 담긴 책이라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안나와 브론스키에게 가려 주목받지 못하지만 콘스탄틴 레빈이라는 인물을 깊게 알게 되어 기쁘다. 자신의 삶에 대해 의문을 품고 무한히 질문하고 반박하는 모습에 감히 러시아의 뫼르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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