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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오이디푸스 왕 / 소포클레스 작.

운명 앞에서의 책임.

by 피스타치 유

신이 정해 놓은 운명을 맞닥뜨렸을 때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멀게 하는 것으로 운명 앞에서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한 뒤 자식까지 놓게 되는 것은 그의 의지와 행위가 저지른 비극인가? 신들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운명을 정해 놓았다. 그렇다면 모든 행위의 책임은 한낱 인간인 오이디푸스가 아닌 신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곳에 신은 없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목소리만 들려주고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책임이라는 것은 마음가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들은 책임을 질 수 없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오이디푸스 또한 책임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변명을 하며 책임질 수 없는 존재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눈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해 그 책임을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저지른 비극 앞에서 이오카스테의 황금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찔렀다. 그에게 인간다움이란 자신의 행동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더라도 자신의 육체로 한 일에 대해서 육체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의 인간다움이란 육체에 존재한다. 생을 끊어버리는 것도 변명을 하는 것도 아닌 오로지 자신일 수 있는 육체.

왜 하필 눈인가? 보는 것은 명료하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보는 것을 너무 믿는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을 놓치는 실수를 한다.

아마 '인간' 오이디푸스의 시작은 그가 눈을 찌른 후부터 일 것이다. 정해져 있던 모든 예언이 이루어졌다. 그는 눈을 잃었지만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드디어 자유로운 인간의 몸이 된 것이다. 고로 이 작품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은유한 것일지도 모른다. 운명에 따라 죄를 짓고 육체로서 그 책임을 다한 후에 인간으로 태어난다. 앞으로 인간 오이디푸스의 삶은 캄캄할 것이다. 볼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혼란스럽고 불안할 것이다.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운명을 겪어낸 후의 인간. 그리고 새로운 길을 가야 하는 인간. 그러므로 살아간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 아닐까. 이것이 비극적인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처절한 위로의 방식일 것이다.

테이레시아스. 그는 남자이기도 여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남자가 아니기도 여자가 아니기도 하다.

덧붙여,
<오이디푸스 왕>은 어릴 적 읽었지만, (아마도) 딱딱한 번역의 문제로 인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이번에 읽은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은 새로운 작품을 읽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그리스 고전은 천병희~ 천병희~ 하는구나... 싶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혀를 자르는 것으로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졌다. ‘오대수’라는 작명과 육체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 근친상간 등의 모티브로 볼 때 ‘오이디푸스 왕’의 현대적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에서도 같은 모티브를 찾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테이레시아스라는 캐릭터에 흥미를 느낀다. 남들보다 오랜 세월을 살았고. 장님이며. 남자이기도 여자이기도 하다. 그의 얼굴에 자글자글 새겨진 주름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예언을 하는 능력도 있는데. 이쯤 되면 불사신 캐릭터인가 생각되지만. 그는 오랜 세월을 산 만큼 남들보다 배로 고통받았다. 긴 수명과 예언 능력을 얻는 것도 심한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런 캐릭터 앞에서 오이디푸스는 역정을 내고 조롱을 했으니... 쯧쯧.


먼 옛날의 그리스와 달리 현재는 신과 운명에 대한 믿음이 많이 없다. 하지만 비슷한 위치와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 있을 것 같다. 현시대에서 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정치? 사회? 종교? 돈? 나는 그 신이 정해놓은 운명을 거쳐왔을까? 내게 정해진 비극적 운명이 눈 앞에서 펼쳐졌을 때 그 책임을 다 할 수 있을까? 나는 인간으로서 책임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나? 음. 모르겠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리지 말아야지...하고 혼잣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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